나라 밖을 내다보자 16
나라 밖을 내다보자 16
  • 박정기
  • 승인 2022.08.0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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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1993년엔가 버지니아의 한촌인 애포머톡스에 갔다. 물론 남북전쟁사를 쓰기 위해서다. 분단국인 우리는 미국의 전후 처리가 언젠가 올 우리 통일의 교훈이 되리라 싶어 한 수 배우러 간 거다. 그곳은 남군 사령관 리가 북군 사령관 그랜트한테 항복한 시골 마을이다. 만 4년 동안 미국의 젊은이 62만 명을 죽인 남북전쟁이 끝난 바로 그 장소이다. 62만 명은 당시 미국 인구 2500만의 약 2.5%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다. 전승기념비도, 공적비도, 기념관도 없다. 시골집 한 채가 덩그러니 있고, 2층 홀에 책상 두 개, 그림 몇 점이 걸려 있다. 남ㆍ 북군 두 사령관이 만나 그 치열한 전쟁을 끝낸 장소치곤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책상도 그때 두 사령관이 항복 서명을 주고받은 책상이 아니란다. 진짜는 약삭빠른 북군 기병사령관 셰리단이 재빨리 들고 달아났다. 셰리단은 전투도 재빠르게 잘하더라니.

혹시 밖에는 뭔가 있나 하고 나와 봤다. 없는 것은 마찬가지. 그럼 4년 동안 60만 청년들이 죽어간 추모비라도? 아니면 어디나 있는 그 흔한 전승기념비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무것도 없다. 정말. 버지니아 남부의 한적한 시골 마을 그거다.

이 사람들 역사를 왜곡하는 건가? 의심까지 했다. 동네 사람한테 물어봤다. 혹시 내가 잘못 온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저 햄버거집 옆에 한번 가보세요. 거기 뭔가 있습디다." 조그만 비석이 하나 서 있었다.

`바로 여기가 남과 북이 화합을 이룬 곳이다.` 나지막한 돌 비석 위에 새겨진 말이다. 조그만 돌기둥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아, 이 사람들! 미국 친구들 봐라! 잠시 가벼운 현기증을 느꼈다.

나보다 일 년 전에 그곳을 다녀간 김준봉 장군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전사학계의 세계적 권위자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애포머톡스에 갔다가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바람에 애먹었다." 미국을 다녀와서 내게 한 첫 말이다. 그는 리의 신출귀몰한 작전, 인간적 고뇌와 놀라운 리더십을 생각했을 것이다. 남군은 배가 고팠다. 탄약도 없다. 2주 동안 120마일을 싸우며, 도망치며, 애포머톡스까지 왔다. 이곳에서 탄약과 양식을 공급받을 예정이었다. 그런데 재빠른 셰리단이 보급 열차를 먼저 덮쳤다. 기진맥진한 남군은 맥이 다 빠졌다. 오로지 애포머톡스가 목표였는데, 거기 가면 배를 채울 수가 있는데 양식을 통째로 뺏기다니. 남군의 유일한 희망마저 산산조각 났다. 이때 처음으로 리는 항복을 생각했다.

김 장군은 이때의 리의 심경을 생각했을 것이다. 같은 군인으로서 리의 고뇌를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국 친구들은 의도적으로 애포머톡스의 역사성을 지우고 있다. 분명 왜곡이라면 왜곡이다.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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