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미역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미역
  • 김제홍
  • 승인 2022.08.01 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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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김제홍
경남도 해양수산국장

영화 `한산`에서 변요한이 와키자카 야스하루(脇坂安治, 1554~1626) 역으로 열연했다. 그는 일본 전국시대 무장으로 31세(1585년)에 영주(다이묘, 大名)에 오른다.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임진왜란 등에 참전했는데, 임진왜란에서는 주로 해상수운 및 수군 관련 업무를 맡았지만, 후에 육전(용인전투)에도 참가해서 기습작전으로 큰 활약을 했다.

이순신의 1, 2차 출전으로 일본이 연패에 빠지자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수륙병진을 하기 위해 6월 23일 일본 최고의 수군들을 모아서 이순신을 치라고 명령한다. 용인에 주둔한 해적 출신 와키자카를 다시 해안으로 급파하고, 오다 노부나가 시절부터 유명한 수군(해적)인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와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 3인을 소집하여 조선 수군을 치라고 명령했다. 나고야에서 출발한 70여 척의 전선도 추가 투입되었다.

이순신의 3차 출전에서 한산도 대첩(1592년 음력 7월 8일)은 임진왜란사의 백미다. 이순신은 조정의 명을 받고 7월 5일,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전라 좌, 우도의 전선 48척을 좌수영 본영이 있는 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작전을 짜고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다음 날인 6일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원균의 판옥선 7척이 합세하고, 조선 함선 55척의 총사령관은 이순신이 맡았다.(이억기는 이순신보다 16살이나 어렸고 원균은 병법에 어두웠다.)

7월 7일 저녁, 조선 함대는 당포(통영 삼덕부근)에 정박할 때 군마를 돌보던 김천손(金千孫)이 `일본의 함대 70여 척이 영등포와 거제를 거쳐 견내량(見乃梁, 현 거제시 사등면)에 닿아있다`는 정보를 전한다. 실제로 와키자카의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이 그곳에 정박하고 있었다.

먼저 출전 준비를 마친 와키자카는 38세의 혈기로 구키와 가토가 준비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을 먼저 잡겠다고 단독으로 출전을 감행한다. 이때 와키자카가 거느린 함대의 규모(73척)는 그간 이순신 함대가 맞싸운 일본 함대 중 가장 큰 규모였다.

7월 8일, 이순신은 이억기 부대를 통영 동호항(현 이순신공원) 근처에 매복시키고, 원균의 부대는 거제 화도 부근에 매복시킨 후 광양현감 어영담에게 빠른 판옥선 5척으로 와키자카의 함대를 유인하라고 지시한다. 예상대로 와키자카의 함선들은 곧바로 추격해 왔다.

이순신의 함선은 한산도와 미륵도의 중간까지 도망가다가 갑자기 뒤돌아서 학익진을 펼치고, 이억기는 서편에서 원균은 동편에서 중앙의 왜선을 포위한다. 조선 수군의 지자ㆍ현자ㆍ승자총통(地字玄字勝字銃筒)에 일본 함대는 47척이 침몰하고 12척이 나포되어 겨우 14척만 도망친다.

영화의 내용과 다르게 와키자카는 바다에 빠진 후 무인도(한산도로 추정)로 헤엄쳐 갔다. 그곳에서 미역을 먹으며 10일을 버티다가 파손된 배의 잔해로 뗏목을 만들고는 간신히 탈출했다. 도요토미 사후에 일본에 돌아간 와키자카는 이순신에게서 겸손이란 것을 제대로 배우고 처세의 달인이 되어 에도 막부에서 천수를 누린다. 그는 한산도 대첩에 대해서 과장이나 축소없이 자신의 패전을 그대로 기록했고, 이 패배를 잊지 않기 위하여 한산도대첩이 벌어졌던 날에는 집안 전체가 미역만 먹었다고 하는데 그 풍습이 지금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한산도 부근의 미역은 보통 미역이 아니다. 그야말로 영양 덩어리고, 먹고 나서는 한없이 겸손해지는 효과도 있다.

견내량 미역은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등장한다. 매년 5월이면 통영시 용남면 연기마을과 거제시 둔덕면 광리마을 사람들이 전통어법에 따라 8~9m의 트릿대로 돌미역을 뜯어서 채취하는데, 이 어법은 지난 2020년 우리나라 국가중요어업유산 제8호로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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