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3:48 (토)
`학문의 봄` 이루라는 선친의 뜻대로 35년 간 학자의 길 걸어
`학문의 봄` 이루라는 선친의 뜻대로 35년 간 학자의 길 걸어
  • 김중걸 기자
  • 승인 2022.07.03 23: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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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 사람
이 학 춘 이사장
<(사)미네르바 AI 융합칼리지>

독립운동가 할아버지 영향 어려운 환경 속 올곧게 성장
직장ㆍ야간 대학 다니며 주경야독 행정고시 당당히 합격
35세 때 동아대 법학교수로 임용돼 `학문의 봄` 평생 일궈
대학 밖 다문화ㆍ탈북 가정 등 소외계층에도 관심 기울여
동아대 퇴임 후 '순례자교회' 설립 ㆍ노숙자 봉사 활동 시작
"소외자를 돕는 것을 결국 자신을 돕는 것이다"라 말하는 이학춘 (사)미네르바 AI 융합칼리지 이사장.
"소외자를 돕는 것을 결국 자신을 돕는 것이다"라 말하는 이학춘 (사)미네르바 AI 융합칼리지 이사장.

`오늘도 나는 하얀 손을 흔든다
"힘내라구, 내가 있잖아"
 혹독한 겨울바람 뒤에
 너에게는 봄이 오리라
 그땐 나는 땅속에서도 외치리라
"그대를 사랑했노라고"(억새풀)

이학춘(67) (사)미네르바 AI 융합칼리지 이사장이자 협동조합 K-문화예술산업대학 및 K-헬드푸드스쿨 초대 이사장의 자작시 `억새풀`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오늘날 9급 공무원에서 행정고시 합격, 대학교수로 또 목사, 봉사자로 성장하는 모든 과정에서 묵묵히 곁에서 헌신한 아내에게 고마움을 담아 전하는 헌시이다.
 
◆ 호롱불 아래에서 형설의 공을 쌓아
대학교수 이학춘에게는 가족이 가장 큰 울이었고 세상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립운동가인 조부의 영향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올곧게 성장하면서 주경야독으로 끝내 성공을 이루어 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그는 야간대학에 다니면서 행정고등고시(제28회)에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고서도 안정된 공무원 자리를 박차고 나가 약관 35세 때 모교인 동아대학교 법학교수로 임용돼 일평생 대학 강단을 지켰다. 대학에서 그는 제자, 후학에게 법 지식만 가르치는 교육자를 넘어서 다문화가정, 탈북자, 노숙자, 외국인 노동자 등 우리 사회에 그늘진 곳에 희망을 비추는 봉사자 일에도 헌신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인물로 존경을 받고 있다. 대학에서도 대학생만 가르치는 것을 넘어 대학원 국제법무학과 설치, 국제 관계.국제금융전공, 국제재난안전전공 설치, 부산인적자원개발원,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사하다문화가족지원센터, 한국인재뱅크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학교 외부 법인 설립을 주도했다. 개설된 수많은 기구와 법인, 최고경영자 과정 등에서는 수많은 인재를 배출해 사회 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펴고 있다. 2020년 정년 퇴임 후에도 모교인 동아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에 명예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사회 봉사자로 온갖 직함을 맡아 어려운 이웃 돕기에 열정을 쏟고 있다.

◆ 하동 독립운동가 후손의 자긍심으로
이 교수는 경남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독립운동가 후손으로 1955년 3월 4남 4녀 중 6번째로 태어났다. 조부 이종인은 애족장을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4월 6일 하동면 고전면 주교리 배다리 장날에 독립 만세운동을 주동했다가 일경에 체포됐다. 이 교수는 어려운 가정 형편 속에서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보중학교 중학생인 그는 학생데모와 학생회장 선거에 나서 학생회장을 맡는 등 사회와 학교 문제에 적극적인 학생이었다. 호롱불 아래서도 열심히 공부한 그는 명문인 진주고등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당시 진주고 합격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발표됐다. 진주고에서 서울대 진학반에 선발되는 등 공부 잘하는 아이로 미래가 촉망받았다. 이 교수는 가정형편을 고려해 하루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부산상고를 진학하려고 했으나 부산에서 기숙할 곳이 없어 진주고를 택했다고 한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이 교수의 고교 학비는 결혼한 당시 진주시교육청 말단공무원인 큰형이 책임졌다고 한다. 큰형님은 동생들의 학비와 용돈까지 부담했다고 한다. 이 교수는 큰형님의 은혜에 그리고 가족애를 가슴에 새기고 있다. 이 교수는 고교 재학 때인 1973년 여름 하동 시골집에서 불이 나 집이 전소됐다.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 취직하기로 결심하고 그해 1월 경남교육위원회 주관 교육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 수석으로 합격해 부산 서구 서대신동 경남교육위원회 본부에 발령이 났다. 그리고 향학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직장과 인접한 동아대학교 법학과 야간부에 지원해 수석으로 입학했다. 교육위원회와 동아대는 불과 10분 거리에 있었다. 이때부터 이 교수의 부산 대신동 대학가와의 반세기 가까운 인연이 시작된 셈이다. 이 교수는 "야간대학에 가려면 오후 6시 퇴근인데 1시간 전인 5시에 퇴근을 해야만 했다"며 "30분가량 일찍 사무실이 나가는 것이 얼마나 부담스럽고 또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 학춘(學春) `학문의 봄`을 가지라는 이름
이 교수의 선친은 `학문의 봄`을 가지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작명했다고 한다. 자식 교육에 열정이 높았던 선친의 뜻처럼 대학교수의 길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이 교수 역시 야간대학 시절부터 대학교수의 꿈을 꿨다고 한다. 그 길을 위해서는 유학이 아닌 고등고시 합격을 염두에 뒀다고 한다. 유학은 경제적 사정으로 볼 때 엄두도 내지 못할 장벽과 같았다. 1979년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 후 복직과 함께 곧바로 행정고시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매일 야간대학 수업을 마치고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 숙직을 전담하면서 밤을 새워 고시 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동아대에는 `지독료`라는 고시준비반이 있었다. `지독하게 고시를 준비하라는 뜻`으로 설립자인 석당 선생의 지시로 `웅비 동아`를 위해 고시생을 특별 지원을 했다. 행정고시나 사법시험 1차만 합격하면 학비 전액면제에다 식비, 용돈을 지원해 동아대생으로는 `지독료`에 다니는 것만으로도 자부심을 갖게 했다. `지독료` 영향인지 매년 10명가량의 고시 합격자를 내면서 부산대학교 고시 합격자 수를 동아대가 추월하는 법학 대학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 교수는 행정고시 1차 합격 후 교육공무원직을 사직하고 시험에 매진해 2년 만에 고시에 합격했다. 고시 합격 (1982년 11월) 1년 전 캠퍼스 커플이었던 아내와 결혼해 부부의 기쁨은 더할 수 있었다. 이 교수는 고시합격 후 꿈에도 그리는 교수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고시 합격 후 2년여간 행정자치부와 교육부의 행정사무관을 재직하던 중 모교인 동아대로 부터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고시에 합격해 탄탄한 앞날이 놓여 있었으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학교수 직을 수락해 35세의 나이로 동아대 법과대학 교수가 됐다. 교수 임용 후에도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동아대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6년 고려대 법과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해 1982년 2월 수료했다. 동아대 본부로부터 3년 휴직을 허락받아 1990년 9월 독일 빌레펠트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3년 만에 독일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해 노동법 전문 교수가 됐다.

2000년에는 호주 멜버른대학교 교환 교수로 활동을 했다. 독일 유학은 가족에게도 좋은 영향력이 미쳐 아내는 독일 유학 경함을 바탕으로 후일 동아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동아대와 신라대에서 사회복지학을 가르쳤다. 사상여성인력개발센터 초대 관장 등 경력 단절여성의 사회복귀 등 이 분야 사업에 많은 실적을 쌓았다. 은퇴 후 남편인 이 교수와 의사인 딸, 아들, 손녀 돌보기 등을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가족 뒷바라지에 헌신하고 있다.

◆ 다문화 등 사회 소외계층에 희망 주는 사업
이 교수는 제자들에게 학문만 가르치는 학자가 아니다. 그는 부산지방노동위원회 심판위원으로 일하면서 노사관계를 조율하기도 했다. 대학에 경찰법학과, 경찰법무대학원, 학ㆍ연ㆍ산 협동과정 국제법무학과 설립ㆍ설치를 주도하는 등 지역사회와의 협력체제 수립에도 발 벗고 나섰다. 이 교수의 대학발전을 위한 다양한 확장성은 이후 동아대가 로스쿨 인가에 바탕이 되는 등 혁혁한 공이 됐다. 이 교수는 어느 순간 대학 밖으로 눈을 돌렸다. 대학 학과 설립 등을 추진하면서 사회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다문화가정과 탈북 가정 등 소외자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다문화 청소년과 탈북청소년을 위해 2010년 3월 청소년 오케스트라단인 다문화 꿈나무 오케스트라단을 창단했다. 이 교수는 독일 유학 중 음악 치유가 소외 청소년에게 좋은 효과가 있음을 목격한 경험을 바탕으로 청소년 치유에 음악을 도입 했다. 이 교수는 <영혼이 아픈 아이에게 희망을>이라는 책을 내기도 했다. 이 책에서 그는 다문화, 탈북청소년에 대한 지원을 앞으로 우리 사회의 사회적 재난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제시했다. 2018년까지 전국 20개의 다문화 청소년 오케스트라단을 창단했고 218명의 다문화 청소년에게 악기 구입비, 레슨비를 지원했다. 이 교수는 "다문화 꿈나무 오케스트라단은 홍병희 선생님의 노력이 없었다면 사실상 운영이 불가능했을 것이다"며 많은 후원자의 도움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 교수는 학문적 배경인 국제노동법을 살려 외국인 근로자 권익 보호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다. 외국인 근로자 문제는 한국의 문제만이 아닌 전 세계적인 문제로 글로벌 경제의 발전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사회현상이다. 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간 그는 지난 2008년 1월 `김해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운영 계획이 선정되면서 2009년부터 2016년까지 운영을 했다. 외국인 근로자지원센터는 국내 외국인의 권리보호를 넘어 귀국근로자의 본국 생활지원 까지 맡았다. 지원센터가 위치한 김해시 서상동은 외국인 거리가 되는 등 1000여 명이 넘는 김해지역 외국인 근로자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이 교수는 부산 사하구에도 다문화가족지원센터를 설립하고 다국어 동시 학습법을 개발해 다문화 청소년 등의 언어 장벽 해소에도 나서고 있다. 이 교수는 "다문화 청소년은 다문화 국제 인재로의 성장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다"며 "이들은 한국 사회에서 모국과 어머니를 연결시키는 다리 역할을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다국어를 습득하는 것이 미래 진로를 개척하는데 가장 도음이 된다. 이를 위해 나는 2010년부터 다국어 동시 학습법을 공동으로 개발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약용의 아학편을 지석영 선생이 제작한 `조선시대의 영어교재 아학편`에서 역사적 근거를 찾았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서당에서 낭송법으로 영어ㆍ중국어ㆍ일본어ㆍ한국어를 동시에 가르쳤다고 한다.
 
◆ 선한 영항력 확산을 꿈꾸는 봉사자
호롱불 아래서 형설의 공을 쌓아 야간대학생에서 고시 합격으로 평생의 꿈인 대학교수의 길을 걸은 이 교수는 아직도 여전히 목이 마르다. 이웃 돕기 봉사에 더 간절하고 초조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분야에서 소외자가 발생하고 있다. 다문화ㆍ탈북 청소년과 외국인 노동자는 이 교수의 노력으로 청소년오케스트라단과 발달장애인 오케스트라단인 `리빙유 오케스트라단`, 탈북청소년 대한학교인 `예평국제학교`, 외국인노동자 지원센터, 경력단절 여성 지원센터 등 각종 기구가 설립되고 제도화와 함께 후원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노숙자에 대한 사회적 시선은 따갑기만 하다. 노숙자에게 향하는 시선은 `더럽다` 거나 `게으르다`는 것에 머문다. 이 교수는 "그들 노숙자는 한때 사회의 일원으로 당당하게 살아 온 사람들이라며 아픈 사람일 뿐"이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일정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이른바 잘 나가던 사람이 노숙자가 된 배경을 찾아서 우리 사회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이 교수의 생각이다. 사업 실패나 가족의 유고 등 정신적 충격과 황폐화가 불러온 일종의 정신.심신의 장애 등으로 자포자기, 무기력, 공허감에 빠져들면서 길거리를 배회하게 된다고 한다. 노숙자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꾸기를 바란다.

이 교수는 "다문화 청소년 오케스트라 등 소외자의 꿈을 위한 기구 창단과 설립에는 많은 후원자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며 "소외자를 돕는 것을 결국 자신을 돕는 것이다"고 밝혔다. 그는 한 끼 식사가 절박한 노숙자의 끼니 해결에서 나아가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후원자와 함께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후원자 중에는 중학생 시절 내성적인 자신에게 심술 등으로 관심을 표현했던 여성 동창은 다문화와 탈북 청소년 후원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수많은 대학 학과, 프로그램 등을 조직하고 설립, 창단했지만 벤치마킹되면서 그저 원조로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는 "좋은 프로그램은 특정인이 독점하는 것 보다 확산되는 것이 중요해 개의치 않는다"며 섭섭함 보다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이 교수의 바람은 선한 영향력 확산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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