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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이야기 ⑧
출가이야기 ⑧
  • 경남매일
  • 승인 2022.06.2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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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
(사)가야문화진흥원 이사장

엄밀히 말해 우주는 태초부터 똑같은 현상이 발생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인생도 매 순간 다른 현상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동영상과 같다. 물론 지난 삶을 돌아보아 허물을 반성하고 고쳐갈 수는 있지만 과거 자체를 되돌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삶의 고비에서 진로를 결정하는 순간의 선택들이 그 이후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므로 언제나 깨어있는 삶이 요구되는 것이다. 

장기에서 상대편이 장군을 불렀을 때 궁이 꼼짝하지 못하게 되는 수를 `외통수`라 하며 인생의 어떤 상황에서 궁지로 몰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때를 이르기도 한다. 외통수는 처해진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누구든 이를 맞이하게 되면 여간 곤혹스럽지가 않다. 

독일의 실존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인간이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과 갈등을 겪는 10대의 사춘기를 `질풍노도의 시기`라 했는데 필자는 20대 중반의 나이까지 이러한 시기를 겪고 있었다. 그리고 소의 뿔에 들어갔다 갇혀가는 쥐처럼 외통수에 몰렸고 운명의 흐름은 점점 출가로 귀결되고 있었다.

심신의 병은 끝내 밀양의 가장 오지였던 삼랑진 행곡리 깊은 산으로 이어졌고 서각(書刻)을 하는 김 노인을 선생님으로 모시고 기초부터 착실하게 배워 갔다. 서각은 망치질 한번 잘못해 날이 비뚤어 지면 글이 패이거나 어긋나기 때문에 굉장한 집중을 요한다. 때문에 잡다한 번뇌를 순간 잊을 수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빠져들었다. 몇 달을 하다 보니 날의 머리를 보지 않고 감으로 망치질을 하여도 글을 새길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비로소 서각의 기본이 갖춰진 것이다. 

그런데 이때 예기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선생님이 어느 날 나를 부르시더니 "더 이상 암자에 살 수가 없다. 자네에겐 미안하지만 나는 떠나겠네" 하시는 것이었다. 이유인즉 주말마다 암자에 오는 신도들과 음식 문제로 몇 번 갈등을 빚어왔는데 "암자에서 채식만 하라는 신도들의 요구가 이해는 되지만 나는 나이도 들어 기력이 달리니 들어줄 수 없다"고 하셨다. 육식으로 인한 갈등이 서로 감정으로 치달았고 어느 날 크게 부딪히고 말았던 것이다.

외로운 산골에서 서각의 스승과 제자가 되어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는데 스승이 떠나신다 하니 당혹스러웠다.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에 보통 제자가 떠나는 게 일반적인데 오히려 스승이 제자를 두고 떠나야 하는 정반대의 경우가 발생하였던 것이다. 

며칠 후 결국 서각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떠났고, 얼마간 나는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그래서 오랜만에 부산의 본가로 갔는데 어머니가 뜬금없이 "너 산에 무작정 그렇게 사는 것보다 출가하는 게 어떻겠나" 하시는 것이었다. 산 생활하는 막내아들이 걱정되셨는지 아니면 어디에서 점을 보셨던 것 같았다. 나는 "출가를 아무나 합니까"하고 퉁명스레 답했다. 하지만 마음의 갈등 속에 출가에 대한 고민도 시작되고 있었다.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 번민은 깊어졌지만 여전히 세상에 대한 길은 보이지 않았다. 몇 달 후 출가를 결심하고 먼저 친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에게 나는 출가한다 선언하고 한 잔의 이별주로 작별을 고했다. 이윽고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작별의 절을 올리니 아버님은 덤덤한데 출가를 넌지시 권했던 어머니는 오히려 하염없는 눈물을 쏟아내셨다. 그리고 자식의 출가를 받아들였다.

이제 출가는 현실로 다가왔고 문제는 어디로 출가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런 고민 중 삼일원 아래 토굴에 사시며 오며 가며 마주쳤던 정여 스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언젠가 스님이 출가를 권했을 때 "어디로 가면 좋습니까" 하고 여쭤보니 "군대의 사관학교와 같은 스님 사관학교가 있는데 그곳이 전라도 순천에 있는 송광사"라는 것이었다. 

드디어 집을 나서 버스를 타고 송광사 입구에 도착해 주머니에 남은 몇 개의 동전들을 개울물에 던져버리고 일주문을 들어섰다. 송광사 원주실에 도착해 출가하겠다고 하니 사찰의 살림을 맡고 있는 원주스님께서 5일간 벽을 바라보고 앉는 면벽(面壁)을 하게 했다. 이 기간은 `속복(俗服)`이라 해서 행자가 되기 전 단계로 속가의 옷을 그대로 입고 면벽과 예불을 하였다.

밖에서 보는 절집과 안에서 보는 절집 생활은 확연히 달랐고 사전 지식이 전혀 없었던 나는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렇게도 안 되고 저렇게도 안 되어 출가를 하였지만 예불, 공양, 면벽, 운력 등 모든 것이 생소했고 적응하기 힘들었다. 일주문에 들어올 때는 세상을 포기했으니 여기서는 번뇌가 좀 쉬어지려니 하였지만 번뇌는 형태만 바뀌었을 뿐 여전하였다. 세상을 등지고 출가라는 외통수를 받아들였지만 출가조차 만만치 않은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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