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20:33 (목)
나라 밖을 내다보자 11
나라 밖을 내다보자 11
  • 경남매일
  • 승인 2022.06.20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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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150년 전 이곳은 남ㆍ북군이 처절하게 싸운 전쟁터였다. 낮이면 쌍방이 사생결단하고 싸우던 곳. 밤이면 어린 병사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부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던 곳이다.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있나? 어쩌면 그렇게도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나는 풀밭에 앉아 150년 전으로 생각을 돌렸다. 병사들이 느꼈던 두려움, 지휘관이 겪어야 했던 고뇌를 되새겨 봤다. 가슴이 뜨거워진다. 상상의 회오리가 나를 휘감는다. 함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병사들, 칼을 빼어든 지휘관의 쉰 목소리도 들린다. 마침내 양군은 뒤엉켜 난장판을 이룬다. 고향도 없다. 부모도 없다. 오로지 죽인다는 생각! 그때 인간은 야수가 된다. 내 머리가 너무 뜨겁다. 눈을 뜬다. 보이는 건 야수가 된 인간의 얼굴이다. 고개를 흔든다. 정신을 차리자. 다시 눈을 감는다. 암흑 속에 함성만은 여전히 들린다.

게티즈버그는 워싱턴 북쪽으로 약 40마일 지점의 작은 시골 도시다. 내가 처음 갔을 때 게티즈버그는 꽤 번창해 보였다. 관광객 때문이다. 그러나 남북 군이 싸웠던 전장은 조용하였다. 기우는 석양 아래 평화로운 들판이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남북전쟁의 분수령이 되었고, 단일 전투로서는 남북을 합쳐 5만이라는 최대 사상자를 낸 곳이다.
상황은 이랬다. 남부의 생명선인 빅스버그가 위기에 처했다. 북군 사령관 그랜트가 빅스버그를 포위하였기 때문이다. 남부 대통령 데이비스는 각료를 소집했다. 대책을 논의 끝에 롱스트리트 군단을 파견하여 빅스버그를 구원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회의에 참석한 로버트 리는 롱스트리트 파견을 반대하고 북부의 요충을 공격하는 것이 빅스버그를 구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리의 구상에 따라 남군은 북침하게 되고, 예기치 않게 게티즈버그에서 남ㆍ북군이 일대 전쟁을 치르게 된 것이다.

전장은 게티즈버그 남쪽 교외 나지막한 언덕─동네 묘지 지역이다. 마을의 두 공동묘지에 양군이 포진하고 3일을 싸웠다. 양 진영이 대치한 거리는 1마일, 약 1500m다. 원래 남북 어느 편도 게티즈버그가 결정적 전쟁터가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않던 곳이다. 남군 사령관 리는 펜실베이니아로 침투해 필라델피아나 수도 워싱턴을 위협해 북군의 주력을 끌어내는 게 그의 의도였다. 그래서 게티즈버그 방향으로 이동 중이었다.

남군이 북쪽으로 이동 중인 것을 북군은 알았다. 따라서 북군도 남군의 진로를 따라 멀찍이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북군의 기병여단장뷰퍼드가 게티즈버그의 전략적 중요성을 금방 알아채고 묘지 근처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1863년 6월 30일이다. 게티즈버그는 한 개의 철로를 포함, 9개의 도로망이 모이는 곳이다. 북상하는 남군은 반드시 게티즈버그를 통과할 것이라고 확신하였기 때문이다. 7월 1일 선두부대인 힐 군단의 일부가 게티즈버그에 들어갔다. 부자 나라 북부도시에서 신발이라도 얻어볼까 하고 시내를 기웃거렸다. 남군 병사들은 태반이 맨발이었다. 전쟁도 2년을 끌었으니 가난한 남군은 신발도 제대로 공급 못 받는 실정이었다. 때마침 진지를 점령한 북군 기병대가 남군을 향해 총탄 세례를 퍼부었다. 깜짝 놀란 남군은 도망쳐서 본대에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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