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3:53 (토)
오월은 잔인한 달
오월은 잔인한 달
  • 이광수
  • 승인 2022.05.08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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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방담 <春秋放談>
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비 개고 5일/너 온다는 기별/온 세상이 훤히 열리는 데/내 눈이 감기고목도 잠기네./하늘 아래 눈부신 슬픔이 기쁨일까/기다림은 풀잎에 걸고/눈물은 하늘에 띄우네./숨이 막혀, 숨이 차/마음만, 마음만 하던 숨탄것들/푸새, 나무들, 봇물 터지듯/귀청 아프게 초록빛 뿜어내니/올맺은 가락가락 풀어내며/오월은 또 그렇게 저물 것인가. `<오월은 오고> 홍해리

눈부신 장미의 계절 5월이 왔건만 기다리는 임 소식은 아득한데, 온 세상은 푸른 잎새와 만발한 꽃들로 가득하다.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애잔한 그리움이 피어나는 `오월의 시`이다. 이처럼 오월을 노래한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시인이 아니라도 시인이 되는 계절의 여왕 5월. 겨우내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푸르른 잎새 힘찬 용트림하고, 살랑거리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정겨운 계절이다. 그러나 이런 아름다운 5월의 풍경도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각양각색일 것이다. 봄은 희망을 노래하고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하지만 그리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에겐 가슴시린 아픈 추억으로 기억될 뿐이다.

시인 T.S. 엘리엇은 <황무지>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기억과 욕망을 뒤섞고/봄비로 잠든 뿌리를 휘젓네…`로 시작하는 이시는 필자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무척 좋아해 암송했다. 일찍이 명작에 심취해 문학도를 꿈꾸었던 나는 긴긴밤을 하얗게 지새우며 세계명작들을 독파했다. 그때는 이 시의 깊은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시가 상징하는 메타포(metaphor, 은유)가 무척 궁금했다. `왜 찬란한 봄의 계절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라는 의문이었다. 청소년기를 지나 문학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비평가들의 시평을 읽어보니 비로소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한 시인의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시는 인간의 정신적 메마름과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부여하는 믿음의 부재, 성(性)의 허망함과 재생이 거부된 죽음을 노래한 것이었다. 그런데 왜 필자는 찬란하게 빛나는 오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관점에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5월은 봄날의 끝물이다. 3월부터 5월까지 피고 지고를 거듭하던 모든 봄꽃들은 계절의 끝자락 5월에 찬란한 꽃잎을 한껏 터트리고 나면 봄의 향연을 마감한다. 인생으로 치면 젊음의 최절정기인 20대 청춘의 마무리와 같다.

우리는 5월을 `가정의 달`이라고 부른다. 5월 5일 어린이날, 5월 8일 어버이날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월 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옛날엔 스승을 어버이처럼 높이 공경했다. 특정한 날이 많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지출이 많아진다는 뜻이다. 아이들이 있고 부모님이 살아 계시면 상당한 금액의 지출은 피할 수 없다. 필자 같은 구세대 시절엔 어버이날이 아니라 어머니날만 있었다. 여권신장에 따라 아버지가 홀대받는다고 부부공평하게 어버이날로 바뀌었다. 어린이날엔 작은 장난감이나 동화책 한 권에 가족동반 중국집 외식이 전부라서 지출금액이 크지 않았다. 그러나 물질과잉시대를 맞아 장난감도 디지털 시대에 걸맞게 전자장난감과 심지어 노트북, 스마트 폰으로 격상돼 부담이 커졌다. 유아장난감의 경우도 그 값은 천차만별이다. 부모님의 경우 따로 살더라도 용돈과는 별도로 방문해서 가족들과 외식을 한다. 부모님 용돈도 각자 최소 십만 원 이상이고 처갓집 부모도 그냥 못 넘어간다. 친가보다 더 단위가 높을 수도 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다. 와작와작 돈 깨지는 소리가 실감 나는 시기다. 효도도 좋고 자식사랑도 좋지만 한 달 살림살이가 빠듯한 봉급생활자에겐 큰 부담이 된다. 그래서 필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법으로 `5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이름 지었다.

사랑하는 연인들에겐 1년 열두 달 기념일 없는 달이 없겠지만 오월은 각별하다. 특히 오월에 사랑을 시작한 커플들에겐 100송이 장미 꽃바구니에 명품가방 하나 곁들이면 몇 백은 식은 죽 먹기다. 만능 할부카드가 구원의 천사가 된다. 5월의 선물에 소홀한 나머지 사랑이 깨진 커플이 많다고 한다. 고만고만한 월급쟁이 남자의 지갑은 빈털터리가 된다. 사랑이 영원하다면 그까짓 카드빚 좀 진들 어떠랴. 그러나 봄에 만난 사랑 여름에 불태우고, 낙엽 지는 가을이 오면 이별을 고하는 굿바이 문자가 뜬다. 설령 사랑해서 결혼한다 해도 33%가 이혼하는 이혼자유시대가 되었다. 뜨거웠던 5월의 사랑도 메이플라워 선물도 세월이 가면 소멸시효가 완성돼 빛바래기 일쑤다.

인생은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강물처럼 흘러간다. 비록 잔인한 5월이 반복될지라도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보내야 다음 해의 찬란한 5월을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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