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7:28 (금)
하면 된다 ⑤
하면 된다 ⑤
  • 박정기
  • 승인 2022.03.21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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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몬주익 마의 언덕 정상까지 그 상태로 달렸다. 정상에 도달하였다. 이제 골인 지점까지는 2㎞ 남았다. 그때, 영조가 발을 구르는 듯하더니 총알처럼 튀어 나간다. 바로 모리시타를 앞질렀다. 내 눈에는 폭풍으로 보였다. 그대로 내달린다. 모리시타가 따라잡지 못한다. 점점 거리가 벌어진다. 영조는 그날 모리시타는 200m 앞서 테이프를 끊었다.

 한국 마라톤 100년사에서, 애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태극기가 게양대에 오르는 역사적 장면이 1992년 8월 9일, 스페인 땅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날의 승리는 우리 육상의 영광이요, 대한민국의 행운이었다. 그날, 영조가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행운은 일본 선수와 단둘이 승부를 겨룰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날 케냐의 후세인, 탄자니아의 이캉가 같은 아프리카의 강적들과 멕시코의 세론과 가르시아, 특히 더위에 강한 다니구치가의 마의 벽(35㎞ 지점)까지 살아남아 영조와 우승을 겨루었다면 그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왜, 그러면 아프리카계의 탈락이 그렇게 빨리(출발 후 20㎞ 지점에서) 일어났던가.

 바르셀로나의 코스는 출발 후 약 20㎞까지가 해안도로, 15㎞는 시가지 거리, 그리고 마지막 7㎞가량이 몬주익 경기장 언덕길이다. 몬주익 경기장은 평지보다 약 200m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날 경기 출발 시각은 오후 6시 30분, 그곳 더위가 너무 심해 출발시간을 늦게 잡은 것이다. 온도는 섭씨 30도에 습도가 80%. 그런데 공교롭게도 출발 직전, 소나기가 쏟아져 뜨거워진 아스팔트 위로 수증기가 무진장 올라왔다. 안 그래도 높은 그날의 습도에다 지열과 함께 땅이 수증기를 내뿜으니 선수들은 말할 수 없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나기가 우리에게 결정적 행운이 되었다. 아프리카는 기온은 높아도 습도가 낮아 사람이 견디는 것이다. 그런데 그날 출발 직후 해안도로의 습도는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의 강적 아프리카 선수들이 몽땅 해안 도로에서 탈락해버린 것이다.

 우리 선수 마지막 훈련 캠프는 일본 야마구치였다. 그 코스를 택한 이유는 스페인 코스와 닮았기 때문이다. 20㎞ 해안도로에 이어 평지가 계속되다가 마지막 7㎞가 언덕길, 바르셀로나 코스를 꼭 닮은 정말 좋은 코스였다. 지금도 그 코스를 발견하게 해준 행운에 감사하고 있다. 우린 그곳에서 정말 죽으라고 뛰고 또 뛰었다. 일본의 여름 습도는 사람을 죽인다. 바르셀로나 해안도로의 습도 정도는 훈련 때 다 극복했다. 왜 일본이 이 코스를 안 썼나? 그들은 여유가 있는 나라다. 미국 고지 훈련을 주로 했다. 넉넉지 못한 우리 형편도 행운이 되었다. 그뿐만아니라 명품 코스에 하필이면 그 시간에 소나기는 그야말로 우리의 대운이었다. 그럼 운은 어떻게 따르게 하나? 솔직히 잘 모르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운은 항상 나를 따라주었다고 생각한다. 모두기 안 된다고 한 일들이, 그것도 여러 번 잘 풀렸으니 그 이상의 행운이 어디 있나. 그래서 늘 감사하며 기도한다. 그러니까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뭔가 떠오르는 것이 있을 것이다. 늘 감사하자. 기도하자.

 국제무대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것은 정치 경제만이 아니다. 첨단 기술이나 스포츠도 정치 못지않게 경쟁 관계가 치열하다. 스포츠도 우리는 일본과 경쟁 관계다.

 손기정 선생 이후 우리 체력이 자기들보다 좋은 걸 일본인은 잘 안다. `진짜`를 가르쳐 주면 안 되는 것이다. 아오키가 그걸 모를 리가 없다. 그럼 왜 그는 마라톤의 진수를 다카하시를 통해 우리에게 전수했나? 좀 무엇한 얘기가 되겠는데…. 아오키는 그저 돕고 싶은 대로 도왔을 뿐이다. 마음이 가기 때문이다. 왜 마음이 가는가.

 요즘 세상에 큰절하는 예법이 어디 있나. 일본에서도 사라져가는 인사 예법을 외국인한테서 받는다? 이유도 모르게 호감을 느낀다. 마음이 간다. 뭐든 해주고 싶다. 도와주고 싶다. 그게 사람의 마음이다. 딸 바보란 말이 있듯 친구 바보를 만들면 무조건이다. 앞서 말했듯, 양보와 함께 예절은 사람의 마음을 산다. 사람의 마음만 사는가?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고 사회를 밝게 한다. 양보나 예절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든다. 서로 돕고 위한다. 협동한다. 미국인들을 보라. 양보하고 인사 잘하는 게 우릴 앞선다. 선진국은 다 그렇다. 일이란 하면 된다. 물론 안되는 일도 있다. 여기서 안 되는 일이란 인간 능력 밖의 일이다. 능력 밖의 일 -별을 따는 일 같은 것- 빼고는 사람의 일은 하면 다 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생각하고, 노력하고, 도움을 받고, 정성을 다하면 세상사 다 되게 되어 있다. 도움을 받으려면 사람 마음부터 사라. `친구 바보`를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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