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0:58 (토)
하면 된다 ④
하면 된다 ④
  • 박정기
  • 승인 2022.03.14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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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박정기 전 한전ㆍ한국중공업 사장

황영조의 바르셀로나 올림픽(1992년 8월 9일)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영조에 대해 나는 입선(6위까지)은 틀림없고, 운이 따르면 동메달은 되겠거니 하고 바르셀로나에 갔다. 솔직히 금메달은 꿈에도 없었다. 동메달만 되어도…. 남들은 어떻게 여기는지 모르나 나는 올림픽의 메달은 정말 아무나 따는 게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메달의 색깔이 문제가 아니다. 동메달도 정말 무섭도록 값진 것이다.

 그날 경기를 보면(지금도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특이한 현상을 볼 수 있다. 마라톤에는 `마의 벽`이란 게 있다. 30~35㎞ 구간이다. 이때가 선수들에게는 고비가 되기 때문이다. 이 구간에서 인체역학상 저장된 에너지가 모두 고갈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소견이다. 그러니까 `마의 벽`에서 대부분 선수는 처지고 15명 내외의 선두 그룹이 이 지점부터 형성된다. 우승자는 물론 이 그룹 중에 누군가가 된다. 대게 35㎞ 를 지나면서 선두 그룹은 4~5명 단위로 재편성되면서 거리 차가 나오기 시작하고, 40㎞ 전후해서 2~3명만 남아 우승을 다툰다.

 그런데 그날 경기는 20㎞ 를 넘으면서 대부분이 탈락하고 4~5명만 남았다. 특히 22㎞ 지점에서는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의 다니구치 히로마가 급수대에서 다른 선수의 발에 밟혀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개인 최고기록이 2시간 7분 40초로 바로 전년도 도쿄 세계육상선수권에서 가혹한 습도와 고온 등의 악조건에서 우승한 일본의 대표 주자였기에 일본으로서는 뼈아픈 참사였다. 25㎞ 지점을 통과하고는 단 세 사람만 남았다. 황영조, 김완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다른 대회에선 보기 드문 정말 희한한 현상이다. 대개 40㎞ 전후해서 일어날 일이 25㎞ 지점에서 일어난 것이다.

 35㎞ 지점에서 김완기가 뒤쳐지고 황영조와 모리시타만 남았다. 이 현상도 전례를 찾기 힘든 현상이다.

 바르셀로나 코스의 최대 난간이 바로 35㎞ 지점부터 시작되는 5㎞ 언덕길이다. 누구에게나 닥치는 `마의 벽`에다, 악명 높은 몬주익 언덕의 오르막까지 겹치니 선수들에게는 지옥길같이 고약한 코스.

 모리시타는 별명이 `습뽕(자라)`으로, 자라같이 생명력이 강하고 힘이 좋아서 붙은 별명이다. 여기서 모리시타는 갑자기 가속도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체력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의 벽`에다 5㎞ 언덕까지 겹친 이 난코스에서 가속도를 내면 웬만한 상대는 다 나가떨어지게 되어 있다. 화면을 보고 있던 나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모리시타가 당시 일본 최고의 강심장이란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감독이 계산한 모리시타의 승부처다. 영조가 과연 견뎌줄까. 영조도 만만치 않은 체력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야말로 일본의 자라와 한국의 독사가 맞붙었다. 실력과 실력의 대결이다. 모리시타가 계속 선두를 달린다. 영조도 질세라 따라붙는다. 두 발짝 이상 떨어지지 않는다. 2㎞ 정도 지나도 여전히 그 상태다. 나는 그때야 마음을 놓았다. 영조가 이긴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지나갔다. 저 간격을 2㎞ 나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은 영조도 계산하고 있다는 증거다. 체력에서 안 밀린다는 말이다. 영조가 어느 시점에 가속도를 붙이는가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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