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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의 성격① 대승불교
가야불교의 성격① 대승불교
  • 도명 스님 
  • 승인 2022.02.21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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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 사 정 담

오늘날 인류가 역사상 유례없는 발전을 이루게 된 배경에는 고대부터 내려온 문화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 근간에는 기술의 발전과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의 정신문화도 한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정신적 요소인 영(靈)을 배제하고는 정체성을 세울 수 없듯 철학과 종교 사상이라는 핵심이 빠진 문명은 존재하기가 어렵다.

인간의 역사는 이집트, 인더스, 메소포타미아, 황하의 4대 문명과 함께 1980년대 중국 발해만과 요하 주변에서 발견된 요하문명(遼河文明)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왔다. 또한 모든 문명은 예외 없이 고유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종교적 전통을 남기고 있다. 그러한 정신적인 요소는 해당 문명의 발전과 특질을 규정한다.

그래서 문명과 문화는 지금도 지구촌을 나누는 주요한 기준이 되며 각국은 기독교 문화권, 불교 문화권, 이슬람 문화권 등으로 구분되기도 한다. 이와 함께 지역과 민족 그리고 환경에 의해 다양한 종교적 특질이 형성되며 종파에 따라 조금씩 또는 커다란 차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렇다면 옛 가야 지역에 도래한 한국 최초의 불교인 가야불교는 어떤 성격을 가졌을까? `가야불교가 대승불교다` 또는 `소승불교다`, `대ㆍ소승이 혼재한 불교다` 등의 다양한 주장들이 있으나 그 근거가 부족해서인지 몰라도 삼국의 불교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흡하다. 하지만 자료가 부족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가야에 전래된 불교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앞으로 그 실체를 탐색해 밝혀야 하는 연구 분야이다.

가야불교는 가야문화의 기반 위에서 형성됐으므로 가야불교의 성격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체(母體)격인 가야문화의 성격을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가야문화는 김수로왕의 대륙문화와 허왕후의 해양문화가 합쳐진 융복합 문화로 인식되며 가야불교도 이러한 융복합의 성격을 가졌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이다. 한반도 끄트머리 대륙의 끝이자 해양의 시작점에 위치한 가야의 지형적 특수성도 융복합적 문화를 형성하기 쉬운 조건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융복합은 특히 철학이나 문화 분야에선 종합, 혼재, 잡(雜)의 개념으로 사용되는데 모든 것을 포괄하는 `통`(通)과도 같은 의미이다. 흔히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통불교`(通佛敎)라고 하며 그것은 선(禪), 교(敎), 정토(淨土), 밀교(密敎), 토착신앙과의 습합(習合) 등으로 합쳐진 종합불교, 혼합불교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한국 통불교의 시작을 신라의 원효스님으로 보는 경향이 많으나 가야불교를 탐색하다 보면 통불교가 가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은 화엄경인데 추구하는 궁극적 세계를 `화엄세계`라고 한다. 화엄이란 원융과 다양함이며 가야불교는 시작부터 그러한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가야불교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대승불교, 소승불교, 밀교뿐 아니라 도교, 민족신앙, 힌두이즘, 호국불교 등의 다양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원통불교(圓通佛敎)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 가야불교가 왜 화엄인 `통불교`의 성격을 띠는지 옛 기록을 따라 살펴보자.

◇ 대승불교의 요소
대승(大乘)이란 큰 수레를 말하며 개인의 해탈을 우선시하는 소승(小乘)의 상대적 개념으로 자기와 타인을 똑같이 보고 함께 성불(成佛)을 지향하는 불교의 부류를 일컫는다.

대승불교는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의 영적 진보를 위한 헌신에 가치를 두고 있다. 이처럼 허왕후와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온 것은 문명 전파와 함께 중생 구제의 자비심에 바탕을 두었다고 할 수 있다.

1929년 허엽이 지은 <가락국사 장유화상기적비>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화상은 공자로 있을 때부터 수도에 뜻이 있었고, 중생을 제도하고자 멀리서 돌배를 타고 옴에 파미르고원의 말보다 빨랐도다`(和尙公子而修道念 度衆生彌遠及 石舟疾於嶺馬)이 뜻은 장유화상은 왕자로 있을 때부터 출가 수행하였으며, 그가 이 땅 가야에 온 이유도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다. 또한 여동생인 허왕후도 결혼만을 위하여 그 먼 나라에서 목숨 걸고 이 땅에 오진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 역사에서 종교의 전도를 위해서는 목숨까지 거는 순사(殉死)도 종종 있어왔기 때문이다.

허왕후가 설령 중요한 이익이 걸려있는 정략결혼을 위해서라고 해도 생면부지의 신랑 때문에 목숨을 건 항해를 감행한다는 건 쉽지 않은 선택이다. 남매가 목숨 걸고 이 땅에 온 진정한 목적은 `일체 중생제도`라는 대승의 큰 가르침을 실천하기 위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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