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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제 부사
정광제 부사
  • 최학삼
  • 승인 2022.02.17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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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 이야기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정광제 부사(재임기간: 1749년 5월~1751년 4월)는 숙종 14년(1688년)에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연일. 자는 정숙이다. 숙종 43년(1717년) 온양 별시문과 병과로 급제하여 문한관을 거쳐, 영조 1년(1725년) 병조정랑에 올랐다. 같은 해 장령으로 재결에 따른 수령의 부정 및 백골징포의 시정을 건의하였다. 이어서 정언ㆍ장령ㆍ필선 등을 번갈아 역임하다가 영조 8년(1732년) 국상에 불참하여 파직되고, 불서용의 처벌을 받았다. 그 뒤 필선으로 재기용되어 헌납ㆍ장령을 거쳐 영조 23년(1747년) 우부승지ㆍ승지에 임용되었고, 이어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위의 내용처럼 정광제는 장령으로 재직 중 상소하여 재해에 따른 세금 감면에서 관리들의 부정행위와 방납과 백골징포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했다.

 한편, 정광제는 김해부사 재임 시절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어 청덕비가 김해 곳곳에 세워졌다. 앞서 검토했듯이 김해문화원 바로 옆 비림, 김해시청 옆 팔각정 경내, 김해시 신문동 장유중학교 내에도 정광제 부사의 선정비가 있는 상황이다.

 김해시 신문동 장유중학교 내에 있는 `부사정광제청덕영뢰비`는 영조 28년(1752년) 11월에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고,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조 때의 권농정책으로 부사 정광제가 이 보를 완성했기 때문에, 장유중학교 구내 남쪽에 암면을 깎아 부사정광제청덕영뢰비를 영조 28년(1752년) 11월에 세웠다. 그 뒤로 이 보를 비보라 하여 보장을 선임하고 관리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정광제 부사의 청덕은 김해부사를 지내면서 보를 만들어 신문리 앞의 신문들 일대를 관개하게 한 업적이다."는 것이다.

 아쉽게도 `조선왕조실록` 등 사료에서는 정광제 부사의 김해부사 재임시절에 대한 내용을 찾을 수는 없었으나 영조 25년(1752년)에 선정비가 세워졌으니 그 전에 김해부사로 재임했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한편, 다음의 영조 30년(1784년) 12월 23일 `영조실록` 기사에서 고 정광제의 효자문을 세우게 하자는 내용이 있으니 정광제가 그 이전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유추해 보면 정광제 부사는 1752년 선정비가 세워지기 전 김해부사로 재임했고, 1754년 12월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민긍기의 `역주 김해읍지`에는 정광제 부사가 영조 29년(1753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정광제 부사는 생원 장상길의 유복자로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치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갑이 되는 해에 관직을 사직하고 아버지의 제삿날부터 묘 옆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그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위의 기사처럼 조정에서는 효자문을 세워 그의 효심을 기렸다고 한다. 정광제 부사의 효자문은 충청북도 옥천읍 교동리에 소재하고 있다.

◇가장비라 불린 유상필 부사

 순조 20년(1820년) 김해부사 재임 시절 흥부암의 법당 등 중건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유상필 부사는 김해부사가 되기 전인 순조 11년(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평안도 개천군수로 임명되어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웠다. 순자 26년(1826년)에 황해도병마절도사, 순조 33년(1833년)에 양주목사, 순조 34년(1834년)에 우포도대장, 1년35년(헌종 1년) 총융사가 되었다. 헌종 10년(1844년) 다시 우포도대장을 역임하고 헌종 11년(1845년) 다시 총융사가 되었으며, 철종 1년(1850년) 훈련대장이 되었다. 1856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857년(철종 8년) 왕이 인릉에 행차할 때 배왕대장으로 참여하였다. 무예가 아주 뛰어나서 가장비라고 불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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