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21:52 (목)
가야불교의 계승자, 허명철 이사장
가야불교의 계승자, 허명철 이사장
  • 도명스님
  • 승인 2022.02.07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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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김해 조은금강병원 허명철 이사장은 의료인이자 향토사학자라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가야불교 연구의 권위자로 오랫동안의 연구와 답사를 통해 가야불교의 근원을 찾고자 노력해 왔다.

 그러한 노력의 결실로 1987년 가야불교에 대한 최초의 단행본인 <가야불교의 고찰>을 통해 가야불교의 실체를 대중들에게 알렸다. 이 책은 당시 주요 쟁점인 허왕후 도래와 아유타국의 존재 그리고 가야불교 실존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많은 분량은 아니지만 가야불교의 고찰은 가야불교 연구의 필독서라 할 수 있다.

 허 이사장은 젊은 시절 종합병원이 거의 없던 김해 중심가에 금강병원을 개원했고 환자들이 몰려 의사로서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다 어느 때 가야와 가야불교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이후 향토사학자로서 열정적인 연구를 하게 된다.

 그는 김해에서 조상에 대한 숭모(崇慕)와 함께 가야문화의 복원을 위해서는 개인과 단체를 아끼지 않고 지원하였다. 또 환자를 진료하는 과외의 거의 모든 시간을 할애하여 가야 연구에 매달렸다.

 그의 주도로 1980년대 지역의 향토사학자들과 유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야문화연구원`은 지금도 매년 열리고 있는 가야문화 학술대회의 모태가 되고 있다. 그리고 가야불교 연구를 위해 `가야불교 연구회`를 만들고 민족문화 창달을 위해 `배달문화 연구소`와 김해 생림의 산마루 명당에 소도마을을 만들었다. 그의 주변에는 뜻을 같이하는 `허명철 사단`이 있었으며 이들은 국내뿐 아니라 종종 인도, 네팔 등의 국외 답사도 함께하며 동고동락하였다.

 1980년대 당시 허 이사장이 불러일으킨 허황후와 가야불교에 대한 관심은 1990년대 김병모 한양대 명예교수가 쓴 `허왕옥 루트`와 함께 가야의 역사가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가야불교 연구에 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허 이사장은 그의 시조 할머니 허왕후가 시집올 때 파신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해 싣고 왔다는 가야불교의 유물인 파사석탑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200여 일 이상을 그 탑 앞에 가서 명상했다. 당시 파사석탑은 왕후릉 옆 노천에 있었는데 그는 어느 날 명상 중 불현듯 영감이 떠올랐고 사람들을 동원해 그 탑을 분해하게 된다.

 순간 그는 탑의 내부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에 의해 처음 밝혀진 탑의 내부는 사리공으로 보이는 구멍과 윗탑과 아래탑을 고정시키는 듯한 사방의 작은 홈, 그리고 일연스님도 말했던 기이한 문양 등이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바탕으로 탑을 다시 맞춰보니 탑은 현재의 모습과 전혀 다른 역삼각형이었다. 그는 또 탑 원래 모양의 규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탑에서 떨어진 돌을 시료로 하여 과연 가락국기의 원문이 말하는 파사석이 맞는지 성분분석까지 하였다.

 그 방법은 이시진의 본초강목에 나와 있는 것처럼 파사석을 갈아 닭벼슬 피에 떨어뜨리는 것이었다. 그 시험 결과 파사석은 일반 돌과는 달리 닭벼슬 피를 묻히면 피가 굳지 않는다는 옛 문헌의 기록과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한편 80년대 일본의 극우 사학계가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여 한, 일 양국 간에 뿌리깊은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는 끝나지 않을 이 문제를 종식하고자 한가지 결심을 하는데 그것은 고고학적 증거로 가야가 일본에게 문명을 전해준 상국(上國)임을 밝히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부산 대학교 후배인 신경철 교수에게 대성동 고분군 발굴을 제안했다. 그는 근처에 아파트를 구해 신교수가 발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왔고 인부들에게 밥과 술을 사주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그러나 고분은 수많은 도굴로 인해 몇 미터를 파고 내려가도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 이에 발굴 팀장이 포기하려 했을 때 그날 밤 그는 명상 속에서 어떤 영상을 보았다. 그리고는 다음날 발굴팀에게 "딱 하루만 더 파보고 안나오면 포기하세"라며 그들을 설득했다. 그의 간절함이 통했던지 다음날 바람개비 모양의 파형동기와 함께 많은 유물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후 대성동 고분군은 임나일본부를 부정하는 대표적 유적이 되었다.

 이렇게 역사 전공자도 아닌 의사가 열정적인 탐구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낼 때 일반 대중들은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달리 주류의 역사학계 한쪽에서는 냉대와 질시의 눈초리로 "의사가 환자 고름이나 짜면 되지 무슨 알지도 못하는 역사냐"라고 말하며 무시하였다.

 가야의 원형을 밝히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그로서는 권위적인 역사학계의 현실에 실망하였고 이후 이전과 같은 열정도 식어버렸다.

 하지만 최근 가야가 다시 거론되면서 그의 열정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있으며 이제는 그가 밝힌 여러 성과들도 다시 빛을 보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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