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숭조목종(崇祖睦宗, 조상을 숭배하고 종친 간에 화목을 도모)의 정신으로 살아오신 숭안전(가락국 2대부터 10대 왕을 모신 곳) 참봉을 역임하신 종친회 지도위원이 오셨다. 몇 달 전에 저녁 운동을 나선 반려자인 아내를 교통사고로 잃고 외로운 기러기 되었다면서 아내가 다른 일은 간섭해도 꽃씨를 심고 가꾸는 일은 좋아했다는 한 송이 국화꽃을 매년 종친회에 들고 오시는 분이다. 반갑게 새해 인사를 올리자 "하는 일이 잘 풀리고 건강하라" 덕담을 건네면서 여직원에게 세뱃돈을 주셨다. 한 달에 두세 번은 오셔서 가르침을 주셨는데 오늘따라 아무런 말씀이 없다.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먼저 온 족장이 "참봉님 올해 나이가 어찌 되시는지?" 묻자, 그냥 일곱이라 하신다.
팔십하고 일곱이면 아직 걸음마 단계 나이로 백 세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일 년이 지나면 새장가를 가실 것인지를 물으며 농을 한다. 그래도 되겠냐며 힘 부쳐 어렵겠다면서 상처한 탓에, 수로왕릉 참배는 못 하지만 새해라 종친회에 오셨다 하신다. 먹을 것이 흔하지 않던 시절, 고단한 농사일을 마치고 논두렁에 심은 콩을 잘 씻어 불린 콩을 담아놓고 일 년에 한 번 쓰는 맷돌을 헛간에서 꺼내 위 맷돌(암맷돌)과 아래 맷돌(숫맷돌)을 잘 씻어 대청마루에 놓고 한 손으로 어처구니(맷돌 손잡이)를 돌리며 한 손으로 콩을 집어 맷돌 아가리에다 넣고 간간이 콩이 잘 갈리도록 물도 넣어 두부를 만들어 먹었다. 맷돌에 간 뿌연 콩물을 가마솥에 넣고 저으며 간수 넣어 가벼운 불을 지피면, 뿌연 콩물이 어느새 엉기어 흐느적거리는 순두부가 된다.
오동나무로 짠 사각형 틀에다 흰 광목천을 깔고 흐느적거리는 순두부를 담아 광목천으로 감싸 다디미돌(다듬잇돌)을 얹어 물을 빼면 시간이 지나면 맛난 두부가 되는데, 가마솥에서 뜬 순두부 한 그릇에 몇 시간 맷돌을 돌린 고단함이 녹았다. 큰 며느리와 둘째 며느리가 콩을 씻고 맷돌을 돌리느라 분산한 가운데 사랑방 할아버지는 연신 곰방대에 불을 댕기며 헛기침으로 시간을 가늠하는데 소식이 없다. 문틈으로 밖을 내다보니 지게 진 큰아들이 들어오자 큰 며느리가 박 바가지에 순두부를 가득 담아준다. 할아버지는 헛기침에 죄 없는 곰방대만 두드린다. 읍내 나간 둘째 아들이 들어온다. 둘째 며느리도 질세라 순두부를 가득 담아 어서 맛을 보라 한다. 사랑방 죄 없는 놋쇠 재떨이 두드리는 소리 요란한데, 손자를 업고 마실 간 할머니가 들어와 "벌써 다 되었느냐, 아이고, 순두부는 너희 시어른이 제일 좋아하시는데, 드시도록 했는지" 물으며 호들갑이다. 곰방대 두드리던 할아버지. "그래, 나도 마누라 있다" 하시며 담백하고 몽글몽글한 순두부 맛을 입안 가득 담으며 늘어진 수염을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빙그레 웃는다.
"검은 머리 파뿌리(흰머리) 되도록 변치 말자"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하늘나라로 간 아내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귓전을 울리는데, 곱게 차려입은 한복 옷고름이 오늘따라 곱다. 빈손으로 왔다가 옷 한 벌은 건졌다면서 서러워 말라는 외침도 하늘에 흰 구름이 모였다 흩어짐의 이치도 남의 일 같은데 어찌 그리 쉽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우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걸까. 부처님과 예수님 등의 가르침을 믿으면 안다고도 하는데. 먼저 살다 간 눈 밝은 분들도 그리하셨는데 범부인 나로서는 마땅히 그리해야 할 터이고 홀로 된 지도위원님께 사는 동안 건강하시라고, 순두부 맛이 든 얼마 전에 출간한 책을 선물로 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