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사가 없는 김해성의 수성장 권 탁
부사가 없는 김해성의 수성장 권 탁
  • 최학삼
  • 승인 2022.01.2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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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부사 이야기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사충신과 백성들의 피비린내 진동하는 수성에도 불구하고 김해성은 왜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이유에서 인지 권 탁이라는 인물이 김해성으로 오게 된다. 그가 도착했을 때 이미 김해성은 함락되고 난 이후였다.

한편,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의 육군이 연전연패를 당했으나 이순신 장군을 비롯한 수군이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된다. 또한 명나라도 참전하게 되는 상황에서 선조 임금은 임진왜란의 승리를 위해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 백성들의 협조를 이끌어 내고 또한 그들을 구하기 위해서 유서를 내리게 된다. 이 유서는 모든 백성들이 읽을 수 있도록 한글로 된 것이었다. 선조국문유서의 주요 내용은 부득이 왜인에게 잡혀간 백성들의 죄는 묻지 않음은 물론, 왜군을 잡아 오는 자, 왜군의 동태를 자세히 파악해오는 자, 포로된 조선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온 자는 양천을 구별하지 않고 벼슬을 내려주겠다는 내용이다. 또한 이군과 명군이 합세하여 부산과 동래 등지의 왜군을 소탕하고 그 여세를 몰아 왜국에 들어가 분탕하려는 계획도 알려주면서 그 전에 서로 알려 빨리 적진에서 나오라고 당부하는 것이다. 이러한 선조국문유서는 어서각에 보관되어 오다가 1975년 7월 도난당하기도 했다. 다행히 다시 찾아 복사본을 어서각에 보관하고 원본은 부산시립박물관에 보관 중이다.

 권 탁의 숭고한 희생이 있고 난 후에도 김해성에는 부사가 부임하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김해성이 함락된 이후부터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조 31년(1598년) 11월 19일, 즉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임진왜란이 종료된 시점에야 비로소 김해성에는 부사가 부임하게 된다. 김해부사 정기남(재임기간:1598년 9월 15일~1599년 4월)이 그 인물이다. 정기남 부사도 김해성에 바로 부임하지 못하고 성주의 병사진에 도임하였다가 임진왜란이 종료된 시점에 김해성에 부임하였다. 정기남 부사가 부임하기 전에도 조정에서는 김경로, 김준민, 이종인, 백사림, 이여념 등을 김해부사로 임명하였다. 그들은 왜국의 김해성 점령으로 인해 김해성에 부임하지 못하고 진주성에서의 김준민 부사 및 이종인 부사, 황석산성에서의 백사림 부사처럼 다른 지역의 전투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 김경로 부사 남원 출신이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도중에 포기하고 무예를 닦아 무과에 급제하였다. 1587년(선조 20년) 경성판관이 되어 두만강 변 여진족을 소탕하는 데 전공을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해부사로 경상감사 김수 막하에서 군사의 규합, 군량조달 등에 노력하였다.

 ◇ 김준민 부사 김준민 부사는 거제현령을 겸임하였다. 그는 선조26년(1593년) 6월 제2차 진주성 전투 때 진주성에서 순절하였다. `선조실록` 8월 7일 기사에는 순절한 거제현령 김준민에게 형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종하였다로 기록되어 있다.

 ◇ 이종인 부사 자는 인언, 호는 운호제이다. 김해부사가 되기 전 이종인은 1583년(선조 16년) 북도병마사 휘화의 군관이 되어 여진족을 정벌하였다. 1593년 4월 경상우병사 김성일의 아장이 되어 선봉에서 사살하고 적을 퇴각시켰다. 그 공으로 김해부사가 되었는데, 그해 6월 왜군이 다시 진주성으로 몰려오자 병력을 거느리고 진주성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고자 하였다. 서예원 목사가 진주성에서 도망하려 하자 단호히 그 불가함을 주장하고 창의사 김천일, 최경희, 황진 등과 함께 진주성 수성에 임하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선조실록` 8월 7일 기사에는 순절한 김해부사 이종인에게 호조판서 겸 지의금부사를 추증하였다라는 기록되어 있다.

 ◇ 백사림 부사 백사림 부사는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1593년 7월 김해부사에 임명되어, 1594년 수륙의 여러 장수들이 거제도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참여하여 조방장 곽재우, 도원수 권율, 통제사 이순신 등과 함께 싸웠다. 그 뒤로는 웅천ㆍ가덕을 수비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란중의 대일본교섭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김해의 백성들을 잘 보살펴 민심을 얻었다. 김해부사 백사림은 1597년 함양의 황석산성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황석산성 전투란 정유재란 초기단계인 1597년 8월 중순, 거창에서 전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인 해발 1190m의 황석산 산성에서 조선의 함양ㆍ안음ㆍ거창의 지역 군민과, 일본 石軍의 가토 기요마사 등 6만여 명의 군대가 벌인 전투를 말한다. 당시 황석산성의 안음현감 곽준을 수성장으로, 別將으로 김해부사 백사림, 그리고 前 함양군수 조종도가 지키고 있었다. 8월 16일 전투가 개시되어 중과부적인 조선군은 18일에는 완전 궤멸되었으나 김해부사 백사림은 미리 도주하였다. 이후 선조 임금의 사면령으로 풀려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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