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0:49 (금)
열정의 그림자
열정의 그림자
  • 이은정
  • 승인 2022.01.25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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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정 수필가
이은정 수필가

바쁜 삶 속에 묻혀 책을 멀리
지식 부족으로 `장벽`에 부딛혀
서점 갔다 돌아오는 길에서
의미를 알 수없는 눈물 한 방울

 사람이 책을 읽는 모습은 아름답다.

 책 속에 깊이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큰돈 들이지 않고도 조금의 시간만 투자한다면 누구나 그 행복을 누릴 수 있다.

 젊은 시절엔 나에게도 독서를 좋아하고 책 속의 지식들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던 열정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부터는 바쁜 삶 속에 묻혀 책을 읽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생의 후반기에 들어서서야 내가 그토록 원하던 환경이 주어졌지만 이제는 시력의 이상으로 독서를 하는 것이 힘든 일이 돼버렸다.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독서를 하면 쉬 눈이 피로해져서 책의 내용에 집중할 수가 없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지식의 부족으로 인한 장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알맞고 멋진 단어를 찾지 못해 헤맬 때는 독서 부족이란 생각이 절실해진다. 단어를 조금 알고 있는 사람과 많이 아는 사람은 삶의 질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죽을 때까지 공부를 해야 한다, 아무런 의미 없이 태어난 인간이 자아의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이라 하는데, 나이가 들어서도 아직 몽매한 나는 어디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막막할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눈에 백내장의 조짐이 보인다. 나이가 들면 찾아오는 그 불청객이 나를 비켜가지는 않을 모양이다. 이대로 가면 나의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질 것이고 나중에는 독서를 하지 못하게 될 때가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아찔해진다.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돋보기를 쓰고라도 책을 좀 더 읽어 둬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진다. 책장에 꽂힌 책들을 살펴보다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본다. 각각의 개성을 갖고 다르게 태어난 인간의 얼굴처럼 책들도 같은 모양이 없고 같은 제목도 없다. 이 보물 같은 친구들이 내 곁에 있었다는 걸 새삼 감사하며 내 손길이 닿지 않았던 몇 권의 책을 꺼내 놓았다. 그리고는 새 마음으로 책을 일기 위해 오래된 의자를 버리고 반듯하고 세련된 새 의자를 마련하고, 노송나무 냄새가 솔솔 나는 원목 독서대를 사서 책상 위에 놓고 보니 책이 저절로 읽힐 것 같아 마음이 흥분됐다. 무엇인가 하고 싶은 열정이 생긴다는 것은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른다. 열정이 남아있는 한 절대로 노인이 아니라는 사무엘 울만의 힘찬 외침이 들리는 것 같았다.

 겨울 날씨 같지 않게 따스한 어느 날, 나는 기분 좋은 외출을 했다. 책을 사기 위해 서점을 찾아간 것이다. 근처의 책방들이 모두 없어져서 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가서 큰 서점을 찾았다. 서점 안으로 들어서니 분야별로 진열된 수많은 책들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많은 책 속에 담겨있는 천문학적인 지식에 비하면 내 알량한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은 너무나 보잘것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책을 들여다보는 여고생 몇과 교양서적 코너에서 서성이는 중년의 여인이 아름다웠다. 이곳저곳 기웃거리다가 내가 좋아하는 여류시인의 신작 에세이집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인문학`이란 책을 골랐다.

 `안광(眼光)이 지배(紙背)를 철(撤)한다`는 말이 있다. 젊음의 힘과 열정을 느끼게 해주는 이 말을 나는 사랑한다. 그러나 지금 내 형편은 책의 내용을 다 헤아리기 전에 내 눈이 먼저 구멍이 나 버릴 지경이다.

 그러함에도 이렇게 객기를 부리는 것은 앎에 대한 허영심일까. 아니면 빛바랜 꿈 조각이 아쉬운 탓일까. 외투 깃을 세워 바람을 막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피로한 내 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진다.

 나에게서 떠나버린 열정의 안타까운 그림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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