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불교 계승자 이종기 선생
가야불교 계승자 이종기 선생
  • 도명 스님
  • 승인 2022.01.24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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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길은 본래 있던 게 아니다. 누군가 최초의 걸음을 가고 그를 따라 많은 이들이 다니다 보면 나중에 뚜렷한 길이 생기게 된다.

 이처럼 어느 분야든 최초의 개척자는 처음이라는 영예도 따르지만 미지의 분야에서 길을 헤매기도 하고 기존 관념에 얽매인 이들의 오해와 시기 그리고 질투까지 받기도 한다.

 일례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호사가들이 모여 콜럼버스의 업적에 대해 폄하해 말하길 "저 정도 발견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야"라며 면전에서 그를 무시했다. 마침 그는 앞에 있던 삶은 달걀을 들면서 "이 달걀을 탁자 위에 세워보시오"라고 했다.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자 그는 달걀의 뾰족한 부분을 조금 깨뜨려서 탁자 위에 세웠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걸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라고 반응하자 콜럼버스는 "이 쉬운 일을 당신들은 못 했지 않느냐"라는 한마디를 던지며 상황을 정리했다고 한다.

 가야불교 초기 연구자였던 아동 문학가 이종기 선생도 자신의 전공이 아닌 역사 분야에더 열정을 쏟아부었다. 그리하여 주업과 부업이 바뀐 듯한 삶을 사셨고 당대에 숱한 오해도 받았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 신라 고도 `경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우리의 역사가 아닌 일본의 역사를 배웠고 우리말이 아닌 일본어를 배우면서 성장하였다.

 그는 성인이 되면서 세뇌된 황국사관을 씻어 내고 자신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일연스님의 `삼국유사`를 접하게 되었다.

 `삼국유사`를 접하면서 그는 신선한 충격과 함께 잃어버린 옛 고향을 다시 찾는 듯하였고 `일연스님`이란 한 인간의 매력에 깊이 빠져버렸다.

 그는 본래의 영민함과 어릴 때부터 배운 한문과 일본어를 바탕으로 삼국유사와 함께 중국과 일본의 문헌들도 열람하며 원문을 탐구하게 된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탐독하며 그가 당시에 살았던 가야의 옛땅인 김해 지역 곳곳을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허왕후릉 옆의 파사석탑, 수로왕릉 납릉 정문의 코끼리와 쌍어, 은하사 대웅전의 신어 문양 등의 흔적들을 답사하였다.

 또한 초선대의 마애불, 장유사, 모은암, 부은암, 흥국사 등의 가야불교 연기사찰들을 몸소 찾아 다니면서 `삼국유사`의 `가락국기`나 `금관성 파사석탑조`의 가야불교 기록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된다.

 이후 1975년 인도에서 열린 국제 펜클럽대회에 한국 대표 자격으로 참가한 그는 허왕후의 고향 아요디아에 가서 그 도시의 문장(紋章)이 쌍어문임을 발견하였다. 또한 동남아 불교문화의 권위자 로케쉬 찬드라 박사를 만나 명월사의 사왕석이 고대 인도와 가야의 교류의 증거라는 말을 듣기도 하였다.

 인도를 다녀온 후 인도 탐방기를 조선일보에 연재하여 일반 국민의 관심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으나 기존 강단 사학계는 견제와 함께 역사 비전공자라는 낙인으로 그의 연구들을 폄하하였고 한낱 역사 애호가의 관심 정도로 무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망을 꺾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가야에 대한 사랑과 `삼국유사`와 일연스님에 대한 천착과 탐구는 어떤 이익이나 명예를 위해 시작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 선현들이 남긴 기록과 역사의 흔적을 귀중하게 여긴 순수한 마음의 발로였다.

 1970, 80년대 해외로의 출국이 쉽지 않는 시대적 상황과 넉넉하지 않은 개인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야의 고대사를 풀기 위해 여비를 마련하여 인도뿐 아니라 일본도 수차례 탐방을 하였다.

 부족한 여비였기에 목적지에 가서는 자전거를 빌려 타거나 아니면 도보로 주로 다니면서 역사의 흔적을 찾아 외로운 탐구를 지속하였다.

 이종기 선생의 연구는 개인이라는 한계와 자료 부족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일반 학자들이 생각하지 못한 신선한 발상으로 접근해 가시적인 성과들은 냈다. 그러한 활동에는 문학가의 영감이 일조하였으리라 본다.

 그의 연구 중 쌍어문과 가야불교에 대한 내용 뿐 아니라 일본에 존재하는 수로왕의 신사(神社), 수로왕의 딸이라는 일본 최초 여왕 `히미꼬`의 연구 등은 앞으로 지속적으로 탐색을 해가면 우리가 몰랐던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점은 그가 60대 중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과 인연을 다하였기에 가야의 복원이라는 당신의 꿈을 다 펼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종기 선생의 자녀들이 생전 그의 유고를 모아 `가야 공주 일본에 가다`라는 책으로 엮어 선생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하였고, 그의 열정과 삶은 후학들에게 이정표가 되고 있다.

 가야불교를 논할 때 `이종기`란 이름과 함께 그의 노력은 기억되어야 하며 다시 역사 속에서 재평가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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