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43 (금)
함안에서 달려온 의병장
함안에서 달려온 의병장
  • 김해부사 이야기
  • 승인 2022.01.20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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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삼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최학삼 김해대교수 사회복지상담과

앞에서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인 김해의 사충신에 대하여 검토해보았는데 추가적으로 검토할 인물이 한 사람 더 있다. 김해의 사충신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각기 김해성으로 장정들을 이끌고 들어왔을 것이다.

 그 이후에 왜군이 들이닥쳐 전투에 임했으나 최고지휘관인 서예원 김해부사가 성을 나가버리자 김해성 수성전의 책임자가 된 것이며 4월 20일 모두 장렬히 전사했다. 이러한 김해의 사충신과 비슷한 시기에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달려온 또 다른 의병장인 함안 출신의 이 령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 부산진성과 동래성이 각각 4월 14일과 15일에 함락되었고, 그 이후에 왜군들은 방향을 나누어 밀양, 울산, 김해 등으로 진출했다. 김해로 방향을 잡은 왜군 제3대는 다대포에서 배를 타고 죽도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김해로 쳐들어왔을 것이다. 분산성 봉수대의 봉화가 이미 올랐을 것이고 김해성에는 주변 지역에 구원군을 요청하였을 것이다. 왜군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함안에서 의병 100여 명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달려온 의병장이 바로 이 령이다. 그렇다면 이 령이 창의, 즉 의병을 일으킨 시기와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언제였을까?

 김해의 사충신들인 손 빈과 이대형은 서예원 부사의 구원요청을 받고 각각 4월 14일 또는 15일쯤에 김해성으로 의병들을 이끌고 들어갔다. 김득기 또한 송 빈과 이대형이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난 후 의병들을 이끌고 들어갔다.

 이 령의 경우 김해성 전투 참전과 관련한 자료인 `충순당 안내`를 사진으로 제시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동래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공은 평민으로서 전국 최초로 1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해 김해성으로 달려가 참전하였다`로 기록된 부분이 있다.

 동래성은 4월 15일 함락되었다. 이 령이 동래성의 함락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였으니 4월 15일 또는 16일에 창의했을 것이며, 함안에서 김해성까지의 거리를 고려해 보면 아무리 빨라도 4월 16일 또는 17일에 김해성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창의는 김해의 사충신과 비슷한 시기가 될 수 있으며, 의병을 이끌고 김해성에 도착한 시기는 거리 문제로 인해 조금 늦게 도착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던 간에 4월 17일 김해성 전투가 벌어졌고 김해성을 구원하러 왔던 지방관들인 초계군수 이유검, 의령헌감 오응창, 합천군수 이 숙과 김해부사 서예원이 4월 19일에 김해성을 나가버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래서 거의 의병들과 백성들만이 김해성의 수성전에 나서게 되었다. 결국 4월 20일에 김해성이 왜군에게 함락될 때 김해의 사충신은 물론 이 령도 장렬히 전사했다.

 굳이 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을 김해의 사충신이냐 아니면 이 령이냐를 따지는 것에는 큰 의미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르게 생각해 보면 사충신과 이 령 장군 외에도 김해 인근 지역에는 충의로 이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들어왔으나 기록에 남지 않은 의병장들도 있지 않았을까?

 또한, 백척간두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부산진성, 동래성에, 다대포진성에도 의병을 이끌고 와서 전투에 참전했던 의병과 의병장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해 본다.

 하지만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의 형제, 자손, 친척들도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나라에 충성했거나 남겨진 부모와 가족들을 잘 봉양하여 효를 이행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임진왜란 최초의 승병장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청주성 전투에서 승리한 영규대사일 것이다. 안 민은 승려는 아니었으나 앞의 내용처럼 승병을 이끌고 김해성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입석강에 전사한 것이다.

 안 민을 임진왜란 때 또 다른 최초의 승병장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따를까? 그는 김해성이 함락되었음을 듣고 승도(승병) 백여 명을 이끌고 성 안으로 싸우러 가는 도중 입석강에서 적을 만나 저항하다가 적의 손에 죽었으므로 승려 출신은 아니더라도 승병장의 호칭을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한편, 김해성 전투 이전의 부산진성이나 동래성 전투에서도 승려가 참전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적의 침략에 도망가지 않고 결연히 맞선 일반 백성, 의병, 승병, 육군 및 수군의 관군과 장수들은 모두 우리의 조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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