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9:08 (금)
계절은 바다처럼 흐르는데
계절은 바다처럼 흐르는데
  • 이도경
  • 승인 2022.01.12 22: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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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경 보험법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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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서로 다투어 온통 색색의 물감으로 산과 들에 그림을 그려 놓을 때, 묵묵히 기다리는 듯, 가장 늦게 물드는 나무가 있다. 우두커니, 이 표현이 어울릴 듯 한 나무, 모든 나뭇잎이 낙엽 되어 질 때쯤 구슬을 꿰매 달아 놓은 듯, 조롱조롱 열매가 다투어 여물며 샛노란 잎사귀와 함께 온몸을 단장하는 은행나무다.

20년쯤 되었을까, 시내버스로 출퇴근을 할 때였다. 대티 터널을 지나 첫 정류소에 내려 약 10분정도의 거리를 걸어서 출근을 했다. 늦가을이 되면 그 길은 온통 노오란 카펫의 길이었다. 이른 아침이니 미화원 아저씨의 손길이 닿지 않아 사각사각 은행잎을 밟으며 출근을 할 때면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기까지 했던 길, 은행잎이 다 질 때까지 매일 걸어 왔던 그 출근길이 잊혀 지지 않는다.

계절마다 색깔을 달리하여 봄엔 파스텔톤의 연초록으로, 여름이면 진초록으로, 가을이면 황금빛으로 물든다. 그리고는 마지막인 혹독한 겨울을 나기위해 황금빛 옷을 하나 하나 벗어 도로에 노오란 카펫을 깔아 놓는다. 은행나무 하나도 이렇듯 계절마다 모습을 달리한다.

사계절중에 아름답지 않은 계절이 있을까. 그중 가장 화려한 계절이 있다면 가을일 것이다. 그저 가을이 오면 들뜨기만 했던 나이, 이제 몇 번을 더 아름다운 계절을 감상 할 수 있을까 문득 세어보자니, 왔던 길 만큼은 훨씬 못 갈 것 같다. 언제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을까, 내일은 또 내일로 미루고, 내년은 또 후 내년, 이러다가 지금에 서 있다. 오늘은 어제의 내일 이건만,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이지만 한 날 같으니, 바닷물이 쉼 없이 흘러도 어디로 흐르는지 그 방향이 보이지 않듯, 우리의 삶도 그렇게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해마다 가을을 만나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하지만, 늘 같은 줄만 알았던 것은 젊어서였나보다. 이쯤에 와보니 한 계절 한 계절이 귀하고 소중하다. 빨리 이 추운겨울이 지나고 봄을 기다리던 그 마음보다 이 겨울의 싸아한 찬 공기가 온 몸을 감싸고도니 오히려 희열을 느낀다.

스콧 니어링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의 글귀가 떠오른다. 지적생활을 하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는 중병을 제외하고는 가족이다. 남편의 식사준비, 부정정적 발언으로 인한 아내의 못마땅한 마음상태, 가족은 더없이 소중한 존재지만 지적생활에 있어서는 마이너스 라고. 어쩜 그 말이 바로 내 마음인 것에 차라리 위안을 얻는다. 그렇다고 달리 할 수 없으니 이것이 삶이라는 한 글자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리라.

시간이 흐를수록 혼자이고 싶어지는 것은, 싫어서라기보다 자유하고 싶음이 아닐까. 나는 오롯이 나이고, 편안함이 행복임을 깨달아 가는 나이 탓. 내년 이맘때쯤 그 겨울에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미래의 나를 만들어 가기위해 오늘의 나를 살고, 수없는 시간의 징검다리를 건너 왔으니 추억의 실타래를 풀어놓고 행복해 하는 그 날이 되면 좋겠다.

계절의 바다위에서 서 있는 저 은행 나무도, 이 겨울이 지나면 새로운 은행잎을 싹 틔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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