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형(論衡)은 중국 고대전적 가운데 그 가치를 인정받은 총집결체인 <사고전서목록제요(四庫全書目錄提要)>에 등재된 평론서이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강희제가 기윤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서지학총서(書誌學總書)다. 총 2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이를 간략하게 요약한 <사고전서간명목록>20권도 별도로 편찬했다. 몇 년 전 국내에서 역주<사고전서간명목록>이 출간되어 필자도 한질 비치해 역학공부에 참고하고 있다. 간명목록 제13권 잡가류 191종 중 한 편인 <논형>은 후한시대 왕충(王充)이 지었다. <논형>은 제목 그대로 평론의 저울을 가리키며 언론의 시비와 진위에 대한 표준을 제시한다. 간명목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후한 왕충(27~97)이 지었다. 원본은 85편이었으나 현행본은 그중 1편이 실전되었다. 왕충은 태어난 시기가 후한 말이라서 속세에 대해 분개하고 질시하여 이 책을 지어 선행을 권하고, 사악함을 없애며 오류를 바로잡고 의혹을 해소하고자 했다. 요지는 바르지만 과격함이 지나쳐 도를 넘었다. 문공(問孔)과 자맹(刺孟)이라는 글까지 거리낌 없이 썼다는 점에서는 본받아서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의미를 다 파악하려는 바람에 번다한 문장도 마다하지 않아 그 글도 산만하고 절제가 없다. 그러나 단점 때문에 장점을 평가절하해서는 안되므로(瑕瑜不掩)분별하여 살피면 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왕충은 후한 광무제 때 태어나 활동한 철학가이자 논설가이다. 평생 한미한 벼슬에 머물렀지만 날카로운 문장으로 세상의 잘못 된 풍조를 질책하는 일에 서슴지 않았다. 그는 다양하고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통해 깊이 사색하고 어떤 글에 대해 평자들이 명문장이라고 칭찬해도 반드시 충분한 근거가 뒷받침 된 글인지 살펴서 어긋날 경우 필자의 사회적 명성과 권위에 상관없이 가차 없이 혹독하게 비판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는 물론 맹자와 한비자까지 비판한 강직한 철학가였다.
<논형>은 1편부터 85편까지 20만 자 분량의 글로 사물의 종류를 해석하고 당시 사람들이 잘못 알거나 의혹하는 문제들을 바로 잡았다. 그는 <논형>에서 시경구절을 10회 이상 인용한 것을 비롯해 상서30회, 춘추30회, 예기20회, 역경15회, 논어95회, 맹자17회, 한비자5회, 여씨춘추7회, 회남자35회, 사기25회, 설원9회, 열자5회, 묵자5회, 순자5회, 한서13회, 전국책5회, 노자3회, 신서4회, 법언3회, 초사2회, 산해경3회 이상을 인용해 비평했다.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적과 저서에서 직, 간접으로 인용한 내용들을 보면 그 수를 헤아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필자 역시 나름 오거서(五車書)를 읽었다고 자부할 만큼 다독했지만 왕충의 <논형>을 재독 하면서 그의 독서지평이 얼마나 넓고 방대한지 경탄을 금치 못했다.
85편 중 논란의 대상이 된 28편 문공(問孔:공자에게 묻다)과 30편 자맹(刺孟:맹자를 꾸짓다)편만 간략히 소개한다. 28편문공편이다. `이 시대의 유생과 학자들은 스승을 맹신하고 고인을 추앙하며 성현의 말은 모두 잘못이 없다고 여긴다. 공자의 문인(제자)70명의 재능은 오늘날의 유학자들보다 뛰어났다고 했는데 이 말은 타당하지 않다. 공자가 스승이라는 점에서 성인이 전할 때는 반드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제자 70명도 역대에 걸쳐 좀처럼 나올 수 없는 인물이어야 함에도 궁극을 추구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제자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 밖에 공자와 제자들 간의 문답내용 중 논리성이 결여된 것과 공자의 입신을 위한 처신(유세)등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30편 자맹편에서는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장차 어떤 방법으로 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묻자 맹자는 `인의의 방법뿐`이라고 대답했다. 이때 양혜왕이 질문한 이익은 재물과 안녕에 관한 두 이익 중 `나라의 안녕`에 관한 이익임에도 맹자는 경솔하게 양혜왕이 `재물의 이익`만 원한다고 비난했다. 그밖에 맹자가 제후들을 만나 유세하면서 사리에 어긋나게 문답한 내용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이처럼 그 누구도 언급을 금기시한 공. 맹의 논설과 주장을 긍정과 함께 부정도 기술한 30년 노작인 <논형>에는 왕충의 강직한 기개가 노도처럼 포효한다. 이는 대범함을 넘어 비범함의 통섭에 이른 그의 득지(得知)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2000여 년 전 왕충과 같은 학자적 양심과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지성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상아탑의 숭고한 권위는 빛바래고 엄혹한 현실에 눈감고 침묵하면서 페르소나로 위장한 위선의 폴리페서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학자적 신념을 포기한 채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는 가짜지성의 화신들이 우리를 실망케 한다. 거대한 권위에 맞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학자적 양심과 기개의 부재가 안타까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