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14:21 (목)
논형(論衡)을 논함
논형(論衡)을 논함
  • 이광수
  • 승인 2022.01.09 23: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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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논형(論衡)은 중국 고대전적 가운데 그 가치를 인정받은 총집결체인 <사고전서목록제요(四庫全書目錄提要)>에 등재된 평론서이다. 사고전서는 청나라 강희제가 기윤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서지학총서(書誌學總書)다. 총 200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라 이를 간략하게 요약한 <사고전서간명목록>20권도 별도로 편찬했다. 몇 년 전 국내에서 역주<사고전서간명목록>이 출간되어 필자도 한질 비치해 역학공부에 참고하고 있다. 간명목록 제13권 잡가류 191종 중 한 편인 <논형>은 후한시대 왕충(王充)이 지었다. <논형>은 제목 그대로 평론의 저울을 가리키며 언론의 시비와 진위에 대한 표준을 제시한다. 간명목록의 기록을 살펴보자. `후한 왕충(27~97)이 지었다. 원본은 85편이었으나 현행본은 그중 1편이 실전되었다. 왕충은 태어난 시기가 후한 말이라서 속세에 대해 분개하고 질시하여 이 책을 지어 선행을 권하고, 사악함을 없애며 오류를 바로잡고 의혹을 해소하고자 했다. 요지는 바르지만 과격함이 지나쳐 도를 넘었다. 문공(問孔)과 자맹(刺孟)이라는 글까지 거리낌 없이 썼다는 점에서는 본받아서는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또 의미를 다 파악하려는 바람에 번다한 문장도 마다하지 않아 그 글도 산만하고 절제가 없다. 그러나 단점 때문에 장점을 평가절하해서는 안되므로(瑕瑜不掩)분별하여 살피면 될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왕충은 후한 광무제 때 태어나 활동한 철학가이자 논설가이다. 평생 한미한 벼슬에 머물렀지만 날카로운 문장으로 세상의 잘못 된 풍조를 질책하는 일에 서슴지 않았다. 그는 다양하고 엄청난 분량의 독서를 통해 깊이 사색하고 어떤 글에 대해 평자들이 명문장이라고 칭찬해도 반드시 충분한 근거가 뒷받침 된 글인지 살펴서 어긋날 경우 필자의 사회적 명성과 권위에 상관없이 가차 없이 혹독하게 비판했다.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는 물론 맹자와 한비자까지 비판한 강직한 철학가였다.

 <논형>은 1편부터 85편까지 20만 자 분량의 글로 사물의 종류를 해석하고 당시 사람들이 잘못 알거나 의혹하는 문제들을 바로 잡았다. 그는 <논형>에서 시경구절을 10회 이상 인용한 것을 비롯해 상서30회, 춘추30회, 예기20회, 역경15회, 논어95회, 맹자17회, 한비자5회, 여씨춘추7회, 회남자35회, 사기25회, 설원9회, 열자5회, 묵자5회, 순자5회, 한서13회, 전국책5회, 노자3회, 신서4회, 법언3회, 초사2회, 산해경3회 이상을 인용해 비평했다. 그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적과 저서에서 직, 간접으로 인용한 내용들을 보면 그 수를 헤아린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다. 필자 역시 나름 오거서(五車書)를 읽었다고 자부할 만큼 다독했지만 왕충의 <논형>을 재독 하면서 그의 독서지평이 얼마나 넓고 방대한지 경탄을 금치 못했다.

 85편 중 논란의 대상이 된 28편 문공(問孔:공자에게 묻다)과 30편 자맹(刺孟:맹자를 꾸짓다)편만 간략히 소개한다. 28편문공편이다. `이 시대의 유생과 학자들은 스승을 맹신하고 고인을 추앙하며 성현의 말은 모두 잘못이 없다고 여긴다. 공자의 문인(제자)70명의 재능은 오늘날의 유학자들보다 뛰어났다고 했는데 이 말은 타당하지 않다. 공자가 스승이라는 점에서 성인이 전할 때는 반드시 특별한 재능을 가진 이들에게 가르침을 전수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제자 70명도 역대에 걸쳐 좀처럼 나올 수 없는 인물이어야 함에도 궁극을 추구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는 제자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그 밖에 공자와 제자들 간의 문답내용 중 논리성이 결여된 것과 공자의 입신을 위한 처신(유세)등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30편 자맹편에서는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 장차 어떤 방법으로 이 나라를 이롭게 하겠느냐고 묻자 맹자는 `인의의 방법뿐`이라고 대답했다. 이때 양혜왕이 질문한 이익은 재물과 안녕에 관한 두 이익 중 `나라의 안녕`에 관한 이익임에도 맹자는 경솔하게 양혜왕이 `재물의 이익`만 원한다고 비난했다. 그밖에 맹자가 제후들을 만나 유세하면서 사리에 어긋나게 문답한 내용을 지적하며 비판했다. 이처럼 그 누구도 언급을 금기시한 공. 맹의 논설과 주장을 긍정과 함께 부정도 기술한 30년 노작인 <논형>에는 왕충의 강직한 기개가 노도처럼 포효한다. 이는 대범함을 넘어 비범함의 통섭에 이른 그의 득지(得知)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2000여 년 전 왕충과 같은 학자적 양심과 비판정신으로 무장한 지성이 과연 얼마나 존재할까. 상아탑의 숭고한 권위는 빛바래고 엄혹한 현실에 눈감고 침묵하면서 페르소나로 위장한 위선의 폴리페서들.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학자적 신념을 포기한 채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는 가짜지성의 화신들이 우리를 실망케 한다. 거대한 권위에 맞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학자적 양심과 기개의 부재가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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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한 2022-01-11 06:38:45
종교적 당위성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단지 예술과 오락의 차원에서 이해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이를 예술과 미학적 기준으로 이해해 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는 있어도, 정설이나 사실로 요구하는 예술가는 없습니다. 논형을 지은 왕충은 그 당시 지배층과 유학자들이 이단시하였고, 천년동안 비밀리에 전해진 주장들인데, 주류에서 체계적 학문을 익히지 않고, 영특한 재주로, 개인적인 생각들을 신랄하게 전개한 특이하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여하튼 철학적으로는 새로운 조명대상이 될 수 있지만, 유학과 다른 비주류의 사상가로만 머룰러야 할지 모릅니다.동서양을 따져보면 이런 비주류 철학자들이 아주 많습니다.

윤진한 2022-01-11 06:29:25
이 부분적으로 조명되면, 그 해당부분을 철학적으로는 인정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요즘으로 비교해보면, 학교에서 가르치는 세계사나, 동양사, 서양사, 한국사 및 정사, 유교 대학교수들의 강의교재, 유교경전에 근거한 유학자들의 주장과, 시중의 야설.소설.루머등으로 주장하여 인정을 받는 차이를 연상하면 됩니다.기독교도 로마가톨릭이 중심이고, 그후에 항거자(Protestant의 개신교, 개신교도 이단이라 하는 여러 분파가 형성되는 경우를 볼수 있습니다. 문학적.철학적으로 인정되어도, 교과사적 정론이나, 정통 종교학기준 正論, 역사적 定說로 인정받기는 참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들이 재미로 보는 영화나 드라마는 어디까지나 상상을 도입해, 부분적인 사실과 엮어서 즐기는 예술작품이지만, 법적 타당성이나

윤진한 2022-01-11 06:21:38

한나라당시 유교가 한나라 국교가 되고, 동아시아(중국,한국,베트남,몽고)세게종교가 되었음은 교과서적 정설입니다. 한나라당시 공자님의 위치는 先師정도의 위치로, 시간이 흘러 聖人의 반열이신 先聖으로 추증되신것은 당나라시대입니다.文宣王으로도 추증되심. 공자님은 학자요 교육자이시기도 하셨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인간을 낳으신 하느님(天:시경 天生蒸民)과, 神明,조상신 숭배전통, 성인 天子이신 요.순.우.탕.문.무를 계승하시고, 또다른 성인이신 주공의 가르침을 후학과 제후들에게 교육시키신 것입니다. 왕충이란 사람은 동양 5聖이나 공문十哲의 반열에 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주장이 강하여, 국교나 정설에서 벗어나, 반골이나 이단으로 이름을 날릴수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데, 톡톡 튀는 반골이나 이단이라도 특정비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