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1:17 (금)
허왕후 바로 보기
허왕후 바로 보기
  • 도명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 승인 2021.12.27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명 스님 산 사 정 담
도명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서기 42년 가락국을 개국한 김수로왕은 6년이 지나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을 아내로 맞는다. 그녀는 수로왕과의 결혼을 위해 장장 9000㎞가 넘는 바다를 헤치고 이 땅에 왔다. 이러한 장거리 결혼 항해는 고대 세계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기록인데 이것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대담한 마음을 지닌 여인인지 짐작이 간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은 일연스님이 집필한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남아있다. 여기에는 허왕후가 이 땅에 온 후 행적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녀가 배를 댄 직후 환영사절인 구간이 마중 나왔다고 한다.

 이때 구간들이 허왕옥에게 배를 돌려 대궐로 들어가자 하니 "나는 평소 그대들을 모르는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는가"고 반문하였다. 이 말은 `나는 고향과 부모도 이별하고 목숨 걸며 바다를 건너왔다, 그런데 왜 수로왕 당신이 직접 오지 않았느냐`는 뜻이며 구간을 통해 수로왕을 질책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수로왕은 구간 모두를 보내 최상의 예우를 하였지만 그녀의 마음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이 말은 전해 들은 수로왕도 `그녀의 말이 맞다` 판단하고 주포로 급히 가서 만전을 치고 그녀를 기다렸다. 수로왕은 결혼을 위해 목숨 걸고 온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 신사도를 발휘해 몸소 마중을 나갔던 것이다. 그때 만약 수로왕이 직접 맞이하지 않았다면 허왕후의 자존심으로 보아 그녀는 배를 돌려 갔을 수도 있다는 추측을 해본다.

 사실 이렇게 당당한 허왕후에 대해 그동안 몇 가지 오해들이 있어 왔다.

 `그녀의 존재는 사실이 아니며 도래는 불가능하다` 또는 `그녀는 망한 나라에서 망명한 유민(流民)이다` 등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15일 KNN에서 방영한 <과학으로 본 허황옥 3일>을 통해 그녀의 가락국 도래는 근거가 충분하다는 게 증명되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외국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당시의 활발한 철기 이동 경로로 허왕후가 도래했을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허왕후가 망한 나라의 유민이라는 부정적인 추정도 사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녀가 망한 나라의 유민이라면 최고의 환영사인 구간을 거절하고 `왕 당신이 직접 오라`고 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그녀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국인 아유타국이 망한 나라가 아니라 부강하고 잘 사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세간에서도 친정이 힘 있고 부유하면 신부는 기가 살고 큰소리칠 수 있게 되는 이치와 비슷하다. 그녀의 모국 아유타의 뜻은 `정복되지 않는 나라`라는 말이다. 정복되지 않는 국가가 되려면 부유한 경제력과 강력한 군대를 갖춘 부국강병이 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당나라 승려 현장이 찬한 <대당서역기>를 봐도 `아유타국`은 둘레가 5000여 리에 이르렀으며 곡식이 풍성하고, 꽃과 열매가 매우 번성했다고 나온다.

 또한 그녀의 모국이 잘 살았다는 근거는 그녀가 시집올 때 가져왔다는 많은 혼수를 통해서도 엿 볼 수 있다. `가락국기`에 나오는 그녀의 대궐 도착 후 기사를 보면 "그들이 싣고 온 보배로운 물건들은 내고(內庫)에 두고 사시(四時)의 비용으로 쓰게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부유한 나라의 공주이기에 진귀한 혼수와 보물을 많이 가져올 수 있었고 결혼 후부터 안집 살림하는 창고를 따로 두어 각자 살림을 했다는 말이다. 경제적 독립은 그냥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은 허왕후의 정치적 입지가 만만치 않음을 방증해 준다.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에는 `함께 나라를 다스린 지 150여 년`이란 구절이 나오는 걸로 보면 허왕후가 국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또한 그녀의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예가 김해 김씨들이 허왕후를 허수로 할매라고 지칭하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수로`와 발음이 유사한 `수르`는 범어로 `왕`을 뜻하는데 김수로 할배가 `김왕 할배`라면 허수로 할매는 곧 `허왕 할매`가 되기 때문이다.

 아득한 고대의 역사를 고증함에 있어서 실재했던 그대로를 완벽하게 복원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기록을 근거로 합리적인 추측을 하다 보면 실체에 어느 정도 근접할 수 있다.

 그런데도 허왕후가 존재했다고 말하지만 투명인간 취급하거나 허왕옥이 인도에서 온 공주가 아니라 대륙에서 도래한 세력의 일원이었다는 등의 주장들이 아직도 존재한다.

 또한 허왕후에 대한 오해 못지않게 그녀의 존재 자체를 신화화하며 그녀의 도래를 부정하는 일부 사학계의 시각도 바뀌어야 한다. 다른 나라는 없는 역사도 만드는 일이 많은데 우리는 있는 역사도 우리 내부에서 의심하고 부정하는 실정이다. 아직도 `허왕후 타령`인가 하겠지만 과연 지금도 허왕후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