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16:02 (수)
달력은 우리 삶의 길라잡이
달력은 우리 삶의 길라잡이
  • 김중걸 기자
  • 승인 2021.12.15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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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걸 편집위원
김중걸 편집위원

 코로나19로 외출 자제 중 오랜만에 나들이를 하는 김에 은행에 잠시 들러 달력을 구하려다 손사래를 당했다. 40년 넘게 이 은행을 이용하면서 처음 겪는 상황이 무척 당황스러웠다. "달력을 나눠주지 않는다"는 은행 창구 직원의 단호한 한마디에 달력 봉투를 보고 "저 달력은 뭐냐"고 소심하게 말을 했지만 "업체에 나눠 줄 것이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그는 단호박처럼 단호했고 여지가 없어 보였다. 수년 전 뉴스를 통해 은행 달력 구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동안 우대 고객으로 살갑게 대해오던 은행의 배반(?)에 참담했다.

 지금 시중에서는 은행 달력 구하기 전쟁이 빚어지고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새해 달력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은행 영업점에서 무료로 배포하고 있지만 비대면과 ESG(환경ㆍ사회ㆍ지배구조) 확대, 사회공헌 기금 확대 등으로 종이 달력 제작을 줄이면서 은행 달력 구하기가 힘들어지고 있다. 기업은행이 지난달부터 가장 먼저 연말 달력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KB국민은행, 우리은행 등도 뒤를 이어 배포에 나섰다. 은행들은 대부분 거래고객을 상대로 달력을 나눠 주고 있지만 지점마다 다르다고 한다. 배포 날짜를 지정하거나. 1인 1 달력, 거래가 많은 우수고객에게만 제공하는 등 은행 달력 품귀현상에 다양한 조건도 걸렸다고 한다.

 과거만 해도 은행 달력은 고객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나눠줬다. 은행 달력은 `돈이 들어온다`는 속설로 새해를 앞두고 연말에 가장 먼저 집에 들어놓아야 하는 귀한 존재다. 한국인의 정서 탓인지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은행별로 300만~500만 부 가량의 달력을 만들어 은행 홍보물로 활용했다. 은행으로서는 달력만큼 홍보를 극대화할 수 있는 홍보물은 없다. 은행 이름이 새겨진 달력은 1년 내내 기업ㆍ가게, 가정 등의 벽에 내걸려 은행을 홍보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은행 달력 제작과 배포가 절반 이하 수준으로 뚝 떨어졌다. 스마트폰 등 전자기기 등에서 일정을 확인하는 등 달력을 찾는 수요가 줄었다. 은행 내부에서도 환경 등을 위해 종이 달력을 줄이자는 분위기가 짙어진 추세가 반영돼 해마다 은행 달력 제작이 줄어들고 있다. 실제 은행들은 달력 제작을 더 이상 늘릴 계획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A은행은 오히려 전년보다 달력 제작을 30% 줄였다고 한다.

 은행 달력 제작과 배포가 줄면서 최근 몇 년간 은행 달력 품귀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달력 공급 감소로 소진이 일찍 찾아오면서 헛걸음을 하는 고객도 많다. 은행 창구 직원들도 곤혹스럽고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중장년층 사이에서는 여전히 달력 수요가 있으면서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는 달력을 찾는 전화나 문의가 빗발치고 있다. 심지어 은행 달력 품귀현상에 은행 직원도 집으로 달력을 가져가지 못하는 현상도 빚어지고 있다. 한 은행 직원은 "가장 힘든 것은 오래된 고객에게 달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며 "은행 직원이나 고객들도 달력 줄이기에는 공감을 하면서도 막상 달력을 구하지 못하면 낙심하는 고객 모습에 창구 직원으로서도 마음이 편치 못하다"고 밝혔다.

 은행 달력 물량 감소로 인쇄업계도 울상이다. 2021년 국내 제지산업 월별수급 현황에 따르면 1~9월 인쇄용지 생산량은 약 183t으로 전년 동기(약 170만t)보다 약 13만t이나 줄어 인쇄업계의 극심한 불황을 증명하고 있다. 은행 달력 품귀현상은 또 다른 현상을 빚고 있다. 중고거래 사이트에까지 은행 달력이 등장하면서 몸값을 올리고 있다. 지난해 중고나라가 국내 5대 시중은행에서 제작한 2020년 달력을 거래 물품으로 올린 데이터를 집계한 결과 총 840건에 달했다. 은행 달력 인기는 우리은행, KB국민은행, NH농협은행 순이다. 지난해 중고나라에서는 우리은행 달력이 264건으로 거래가 가장 많았고 이어 KB국민은행이 192건, NH농협은행 164건, 신한은행 117건, KEB하나은행이 103건 순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은행들의 탁상용 달력과 VIP 고객용은 5000원, 1만 원 안팎에서 거래됐다고 한다. 올해도 중고거래 사이트에는 은행 달력이 올라오고 있다.

 한국씨티은행은 지난 2017년부터 달력과 다이어리 제작을 중단했다. 대신 자연보전기관(WWF(세계자연기금))에 기부하는 동시에 은행의 디지털뱅킹 역량 강화에 투자했다. 한국인의 감성과 거리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씨티은행은 내년 1월 국내 소매금융시장 철수를 선언했다. 종이 달력은 날짜를 보는 기능 외에도 인테리어로도 한몫을 한다. 아직도 많은 사람은 달력을 보면서 가족의 생일을 기억해 내고 내일 할 일을 가늠하는 등 우리 삶의 나침판, 등대가 되고 있다. 거래 은행의 배신에도 벽에 걸린 다른 은행 달력으로 2022년을 잘 설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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