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8:07 (금)
김장하는 날, 효도하는 날
김장하는 날, 효도하는 날
  • 백미늠
  • 승인 2021.12.07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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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미늠 시인
백미늠 시인

 코로나에 영향받기는커녕 코로나로 더 열풍인 듯한 김장 시즌이 됐다. 올해는 시어머니와 하는 31번째 김장이다. 해마다 이때쯤이면 멀쩡하던 허리가 아파온다.

 한편 평소에는 몸이 안 좋아 입맛도 없으시고 종일 누워만 계시는 시어머니는 김장 날짜가 다가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옥상 장독대를 하루에 몇 번씩 오르내리시는 건 물론이고, 고춧가루 빻으러 마늘 빻으러 빠진 구색을 갖추느라 시장으로 마트로 다니며 활기가 넘치신다.

 김장을 일 년 농사라 하는 까닭은 4월부터 김장 준비가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일 년 동안 먹는 귀한 양식이요 음식이기 때문이다. 엄선된 재료로 김장을 해 김치냉장고에 그득히 채워 놓으시면 해가 바뀌어도 아무 걱정이 없으시다고 한다.

 평수 넓은 아파트도 아니고 마당이 있는 주택도 아닌 상가 이층집 좁은 배란다 수돗가에서 해마다 하는 70포기 김장으로 내 나이에 할머니 허리가 됐지 않나 싶다.

 절인 배추로 김장을 하게 된 것도 불과 몇 해 전이니 시퍼런 배추와 무가 든 자루를 들어 올리고 다듬고 소금에 절이고 옥상에 있는 고무 물통을 끄집어 내리고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머니, 올해 김장은 시골에 사는 친구 집에서 하기로 했어요. 어머니께 한 통 갖다 드릴게요. 제가 도저히 김장을 못 하겠어요." 가을이 되기도 전에 말을 전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김장은 해야지!" 더 강경하게 말 하시는 시어머니의 깊은 속마음을 모른 척 하며 투덜거렸다.

 어쩌면 김장하는 날이 효도하는 날인데…. 바쁘다는 핑계로 시어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 할 시간도 여유도 없었는데 김장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노모가 하는 말에 맞장구를 쳐 드리는 것이 효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87세다. 어쩌면 마지막 김장일 수도 있는데. 하는 생각이 들자 꼼짝 못 하던 몸이 발딱 하고 일어났다. "어머니 제가 몸살도 나고, 허리도 너무 안 좋아요"라고 철없는 며느리의 엄살을 모른 척 해 주시면서 "이 나이에 김장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다!" 의기양양한 어머니의 쩌렁쩌렁한 음성에 한 편으로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허리 핑계로 식탁에 앉아 양념을 치대려고 하다가 바닥에 앉은 어머니 옆에 앉아 눈높이를 맞추자 어쩐 일인지 허리도 아프지 않았다. "어머니 신기해요,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니 몸살도 가시고 허리도 말짱하네요. 효가 복을 받는 근원이란 걸 정말 알겠어요. 히히히" 하고 웃었다. 아무런 대꾸는 없으셨지만 속으로 흐뭇해하시는 것 같았다.

 실패했던 첫 김장 이야기,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운의 가족사, 아들딸 손자 손녀들 근황에서 대선 이야기까지…. 시어머니의 열변을 듣는 동안 35포기 김장은 후딱 끝나고 뒷정리를 마치고 짜장면을 시켜 먹으며 따끈한 거실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졸기도 하며 밤이 깊을 때까지 뒹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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