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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불교의 흔적 신국사지(新國寺址)
가야불교의 흔적 신국사지(新國寺址)
  • 경남매일
  • 승인 2021.12.0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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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정담 (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삼국유사 <가락국기> 조를 보면 수로왕이 신답평에 새 궁궐을 지을 때 "이 땅은 16나한이 머물만한 자리이다"라고 했다. 또 <어산불영> 조에서는 `수로왕이 부처님을 청하여 설법을 청하였고 부처님이 나찰녀에게 오계를 수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가락국기와 달리 `어산불영`의 기록이 다소 신이(神異)한 내용이 있음을 감안하더라도 기록을 있는 그대로 보면 가야 초기에 이미 수로왕은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김해 명월사 사적비>에는 수로왕이 허왕후와 만나 초야를 보낸 만전 뒤의 산을 기념하여 명월산(明月山)이라 이름 짓고 사찰 세 곳을 세웠다 한다. "길이 나라를 위해 축원하는 도량으로 하였는데 신국사는 세자를 위해 세운 것으로 산 서쪽 벼랑에 있고 진국사는 허왕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산 동쪽 골짜기에 있으며 흥국사는 왕 자신을 위한 것으로 산 가운데 있으니 곧 이 절로서 지금은 삼원당(三願堂)이라 부르는데 두 절은 다만 터만 남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수로왕은 허왕후와 깊은 추억이 있는 명월산에 훗날 세자 거등이 태어난 이후 나라의 부흥을 기원하는 세 사찰을 지었다. 그중 산 서쪽 벼랑에 세자를 위해 지었다는 사찰이 신국사라 하였다. 그러나 `사적비`가 세워진 1708년 당시 흥국사를 제외한 두 절은 이미 폐사되어 흔적만 남았다고 하며 두 절이 정확히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신국사가 그때 이미 폐사되고 절터만 남았다면 300여 년이 지난 현재, 과연 그 흔적이라도 남아 있을까? 필자는 향토 사학자 정영도 선생과 함께 지난 2020년 봄에 현 창원시 진해구의 주포마을에 가서 `왕후사지`를 탐색하던 중 그 마을 토박이인 햇님농원 이성우 대표를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산 서쪽에 있다는 신국사에 대해 물어보니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얘기인즉 이 대표가 30년 전 청년 시절에 친구들 몇 명과 옛 절터가 있다는 곳에 갔었는데 도착한 얼마 후 이상한 냄새와 큰 구렁이가 노리는 있는 듯한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였다고 한다. 그리고는 누구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쳐 왔다는 것이었다. 이 대표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소름이 오싹 끼친다고 하였는데 듣고 있으니 나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에 동행해 줄 것을 부탁하니 흔쾌히 응해 주었다. 나무의 낙엽이 떨어져 시야가 좋은 겨울쯤 함께 가기로 하여, 2021년 2월 초순 쾌청한 날 산에 오르게 되었다. 이 대표의 옛 기억을 더듬어 함께 절터를 찾아 헤매기를 세 시간 넘게 지날 즈음 가파른 산 정상 부근 서쪽의 바위 아래에서 이 대표가 말한 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그 터는 무성한 산죽으로 덮여 있었고, 터 아래의 축대는 거의 4m 가까이 되었는데 큼직한 자연석으로 튼튼하게 쌓아져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편의 다양한 모양의 기와 조각들과 도자기 파편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기와로 지붕을 이은 건물의 흔적은 신국사의 옛터임을 충분히 추측하게 하였다. 그곳이 신국사지였을 가능성이 다분한 이유는 오래된 기와와 축대뿐이 아니었다. 바로 터 뒤의 바위에 올라가면 동남으로 진해와 웅천의 앞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지는데 신기한 점은 남쪽으로 보이는 산과 산 사이에 허왕후가 올 때 처음 관측되었던 가덕도 서북단의 기출변(旗出邊)이 보인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허왕후가 온 뱃길이 잘 보이는 곳에 아들인 세자와 인연이 있는 절을 지었다는 것은 필시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하필이면 산의 팔부 능선 열악한 곳에 많은 공을 들여 절을 지었다는 점은 그 장소가 어떤 특별한 목적이 있다고밖에 볼 수 없다.

 한편 신국사지 추정지 앞의 고개를 `수리등` 또는 `수리고개`라 하였는데 수로왕의 이름이 연상되는 고개 이름이다. 그리고 가야 초기 수로왕이 세운 세 사찰 중 신국사로 보이는 옛터를 발견한 것으로 미루어 <명월사 사적비>의 또 다른 기록도 주목된다. 그것은 1708년 명월사 중수 당시 담 아래에서 수로왕 재위 기간인 건강원년(健康元年), 즉 서기 144년이 새겨진 기와가 발견됐다는 내용이다.

 이렇듯 수년간 가야불교 탐색을 해오면서 느끼는 것이 이 지역에서 전해오는 옛 기록이나 민담 설화들이 상당히 근거가 있으며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이제 가야불교는 `삼국유사에 그런 게 있다 카더라`라는 추정의 차원에서 그 후 좀 더 연구해 보면 `실체가 있을 수 있다`라는 충분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현시점에서는 `역사 속에 실존했지만 잊혀졌던 가야불교를 어떻게 찾아야 할까`라는 방법의 모색과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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