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1:01 (금)
낭만과 로맨스가 사라진 세상
낭만과 로맨스가 사라진 세상
  • 이광수
  • 승인 2021.11.28 23: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세상인심이 각박해져서 일까. 요즘 낭만이나 로맨스란 말을 듣기가 힘들다. 먹고 살기가 예전처럼 절박한 세상은 아닌데도 다들 마음의 여유가 없고 뭔가에 쫓기는 듯 불안한 상태로 사는 것 같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서 피폐해진 것도 원인이겠지만,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될까 두렵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일까. 최근 지상파와 종편TV에서 일제히 남녀 간의 자극적인 로맨스를 다룬 불륜 드라마가 성시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월화, 수목, 금토 드라마 3개를 아무리 원고 마감에 쫓겨도 꼭 챙겨본다. 긴 방콕생활의 답답함 속에서 그나마 정서적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내용이 불륜이든 아니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내로남불이 판치는 세상에 드러내놓고 당당히 하는 불륜이 오히려 떳떳한 것 같다. 남녀 간의 로맨스는 양심의 문제이니까. 그래서 간통죄도 위헌심판으로 종말을 고했다. 남녀 간의 사랑은 억지로 맺어지는 게 아니다. 일방적 구애자인 스토커가 범죄자가 되는 것은 당연지사다. 상대가 호응하지 않는 애정 구애는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고 폭력이다.

 물질문명이 활짝 꽃핀 우리나라도 이제 서구선진국들이 겪었던 물질문명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만사가 돈이면 최고라는 배금주의 사상이 팽배해졌다. 신혼부부가 살만한 작은 평수의 수도권 아파트 값이 10억 이상이라니 말문이 막힌다. 줌마들이 모였다 하면 아파트에 당첨돼 떼돈 번 이야기로 소란스럽다. 낭만과 로맨스의 최고 절정을 누려야할 2030청춘들도 주식과 가상화폐투자 얘기로 목청을 돋우며 갑론을박한다. 가진 자는 가진 자대로 더 가지려 하고 갖지 못 한자는 가진 자에 대한 질시와 원망으로 자기신세를 한탄한다. 힘들고 고된 육체적인 일은 싫고 보수는 고만고만하지만 안전 빵인 공무원 시험에 40만 청춘들이 올인한다. 누렇게 뜬 얼굴로 노량진 고시촌 어느 원룸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며 숨죽인 채 열공한다. 그들에게 무슨 낭만과 로맨스가 있겠는가. 설령 그런 노력으로 취업이 된다한들 평생 결혼과 내 집 마련, 자녀양육의 노예로 사는 고달픈 삶에 낭만을 논할 마음의 여유는 없다. 그리고 그런 무덤덤한 삶에 이골이 나면 스스로 찾아서 낭만을 구하려 하지 않는다. 허울 좋은 낭만과 로맨스는 사치에 불과하니까. 물론 필자의 독단적인 판단일지 모르지만 주변의 세상사는 모습들을 보면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이제 가을의 낭만은 문학작품이나 유행가 가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사치정도로 남았다. 그건 인간관계에서도 쉽게 느낄 수 있다. 명색이 문학을 한다는 사람들도 로맨스나 낭만에 대한 글을 거의 쓰지 않는다. 이 가을이 다 가는 데도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를 읊어대는 중견문인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온통 웹툰에 매달려 돈벌이에 눈멀어 있으며, 책으로 펴낸 시, 소설들은 책방에서 파리만 날린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 늘 혼자만의 삶에 이골이 난 필자는 돈 안 되는 글이지만 죽어라고 쓴다. 쓴다는 게 내 존재 이유이니까. 그러나 나는 내 나이에 상관없이 가슴속 깊은 곳에 잠재해 있는 낭만과 로맨스를 끊임없이 소환한다. 가는 가을을 아쉬워하는 단상도 카톡에 올리고 3분짜리 자작 영상물도 올려보지만 무슨 신파냐 하는 식으로 시큰둥한 반응들이다. 낭만과 로맨스가 사라진 세상임을 절감한다.

 중년을 지나 인생의 참 멋을 느낄만한 나이임에도 모였다하면 돈타령이다. 낭만은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하는 투이다. 그저 누구는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대박을 터트렸다는 얘기나, 자기 자식이 공시에 합격했다는 자랑 뿐이다. 또 그런대로 안정된 삶을 누리는 계층에 속하는 성인들은 모였다 하면 온통 골프 얘기다. 또 청소년들과 청장년층은 웹툰이나 전자게임에 푹 빠져서 산다. 물론 골프 등 스포츠는 취미생활로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위해 좋은 운동이다. 그리고 게임은 즐거움을 주는 놀이문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기에 낭만이 끼어들 여지는 1도 없어 보인다. 오직 이기고 지는 냉엄한 제로섬게임만 존재할 뿐이다.

 로맨스 또한 인스턴트식이다. TV 드라마에서도 세태를 반영하듯 그렇게 연출한다. 1회성의 드라이한 쾌락만 오갈 뿐 진정한 의미의 로맨스는 없다. 그저 돈으로 셈하고 그 셈이 끝나면 각자의 세계로 돌아가 없었던 일로 친다.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비난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면을 쓴 채 뒤로 숨는다. 가을이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다. 가로변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을 밟고 걸으면 왠지 기분이 좋다. 마음 한구석에 조금이나마 남은 낭만과 로맨스가 있다면 서둘러 소환해 볼 일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