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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락국기의 바른 해석 왕후사의 위치 ②
가락국기의 바른 해석 왕후사의 위치 ②
  • 도명스님
  • 승인 2021.11.22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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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정담(山寺情談)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사람은 나이를 먹어 가면 고향을 그리워하고 뿌리를 찾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뿌리 찾기에 대한 인식은 조상 숭배 전통이 강한 동양인에게만 있는 것으로 알았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국내 족보에 관한 가장 많은 자료를 확보하고 있는 인제대학교 도서관의 박재섭 교수님 말씀에 따르면 서양인들도 자기 뿌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과거 영국의 이주민인 미국인들 중 일부는 선조의 흔적을 찾거나 참배하기 위하여 심심찮게 영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이를 위한 전문 여행사까지 있다는 재미있는 사실도 알게 됐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따르면 가야의 시조 할머니인 허왕후를 위해 지었다는 왕후사는 서기 452년에 창건되었다. 이 절은 수로왕과 허왕후가 처음 만난 만전자리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왕후사는 500여 년이 지나 인근에 있던 큰 사찰인 장유사의 주요한 소임자 스님들에 의해 장유사 관리지역 동남쪽 안에 있다는 부당한 이유로 폐사되었다.

 또한, 왕후사가 폐사된 배경에는 고려의 시대적 상황과 요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승려인 장유화상의 선양을 위해 그를 기리는 장유사를 국가의 지원으로 본사로 격상시키는 과정에서 재가자 허왕후를 선양하는 말사인 왕후사는 양립하기 힘든 대상이었다. 가야불교 전래의 권위는 허왕후에서 장유화상으로 그 중심이 이동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다소 설득력이 떨어지는 명분인 `시지 동남쪽`이라는 이유를 들어 본사에서 왕후사를 폐사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폐사의 또 하나의 이유는 명월산 아래 주포마을에는 수로왕이 자신을 위해 지었다는 흥국사(興國寺)가 이미 있었다는 점이다. 본사인 장유사의 입장에서는 한 공간 안에 두 개의 사찰은 비효율적이기에 폐사의 명분이 되었을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기록처럼 이때 왕후사가 폐사되었다면 그 흔적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거의 대다수 가야불교 연구자들이 김해 태정 응달리(현 응달동 733번지)를 부근을 왕후사지로 보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문헌 검증과 여러 차례 현지답사를 통해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기록에서 말하는 왕후사지는 태정 응달리가 아니라 주포 마을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태정 응달리가 장유사가 아닌 이유는 첫째, 응달리는 왕후사 폐사 시 언급된 장유사 시지 동남쪽이 아니다. 응달리는 현 장유사나 대청동사지에서 보면 동쪽이나 살짝 동북쪽에 위치한다.

 둘째, 응달리는 종궐 서남쪽 아래 60보가 아니다. 거의 모든 연구자가 주포에 있었던 종궐의 개념을 모르다 보니 봉황대 본궐을 기점으로 서남쪽 어느 지점을 만전인 왕후사의 위치로 본다.

 그러나 본궐인 현 봉황동 왕궁지에서 서남쪽은 봉황대 언덕인데 수로왕이 본궐을 놔두고 가까운 곳에 만전을 칠 리가 만무하다. 또 응달리는 해수면 기준으로 봤을 때 봉황대 언덕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어, 종궐서남하(從闕西南下)라는 가락국기의 기록과는 맞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태정 응달리를 왕후사지로 비정하면서 본궐과 사찰 사이의 거리를 6000보로 수정해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가락국기 원문에 기록된 본궐과의 거리 육십 보가 너무 짧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궐에서 응달리의 실제 거리가 정확히 육천 보인지도 의문이거니와 현존하는 가락국기 모든 판본의 원문이 육십 보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연구자가 원문을 수정하려면 그것에 합당한 사료나 물증을 제시해야 한다. 종종 근거가 미흡한 상태에서 원문을 자의적으로 변경해서 원저자의 거리, 방향 등의 서술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을 보는데 연구자들이 지양하여야 할 자세라 생각한다.

 그럼 왕후사의 정확한 위치는 어디일까. 천 오백 년이 넘는 시간 속에 과연 실마리가 남아 있을까. 가락국기의 기록에도 왕후사는 폐사 당시에 농장과 창고, 말과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왕후사가 주포 마을에 있었던 종궐(從闕) 서남쪽 아래 육십 보쯤인 것은 분명해 보이나 폐사 당시 워낙 철저하게 흔적을 지웠기에, 오늘날 주춧돌 하나 발견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가야불교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인 가락국기에 등장하는 왕후사를 발굴하면 좋으련만 이러한 이유로 왕후사 발굴은 하나의 바람으로만 남을 가능성이 크다.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왕후사가 들어섰던 만전에서 수로왕 부부가 이틀간 신혼을 보내며 가야의 미래를 꿈꾸고 속삭였던 이야기는 계속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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