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7:16 (금)
가락국기의 바른해석 왕후사지의 위치 ①
가락국기의 바른해석 왕후사지의 위치 ①
  • 도명 스님 
  • 승인 2021.11.15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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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 (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세상에서 처음이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다. 가야 최초의 사찰 창건 기록은 비록 후대이기는 하나 <김해명월사사적비>(1708년)에서 수로왕이 명월산에 창건했다고 말하는 신국사, 진국사, 흥국사 관련 내용이다. 또 다른 기록은 김해 은하사의 <취운루중수기>(1797)에 나오는 부암, 모암, 자암에 대한 기록이다. 이들 사료는 <삼국유사>보다 한참 후대의 기록으로 더 많은 연구와 발굴로 그 역사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그런 한편, 일반적으로 가야불교를 말할 때 언급되는 가야 최초의 사찰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조에 기록된 `왕후사`다. 삼국유사에 창건, 폐사 등 구체적인 내력이 설명된 왕후사는 가야불교 연구자, 역사학계뿐 아니라 가락종친회도 관심을 보이는 사찰이다. 특히 가락종친회가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왕후사가 김해 김씨와 허씨 뿌리의 배경이 되는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팔대 손(孫) 김질왕이 정사에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또 절실하게 부처를 숭상하여 시조 할머니 허왕후를 위해서 재물을 받들어 명복을 빌고자 했다. 이에 원가 29년 임진년(452)에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했던 곳에 절을 세워 절 이름을 왕후사라 하고 사신을 보내 근처의 평전 10결을 측량해서 삼보를 공양하는 비용으로 쓰게 했다"고 왕후사의 창건 내력이 비교적 상세히 나온다.

 여기에는 질지왕이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하고 초례를 치렀던 자리에 `왕후사`를 세웠다고 나오는데, 가락국기의 다른 대목에는 초례를 치룬 곳이 `만전`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만전의 위치를 알면 왕후사의 위치는 자연스럽게 규명되는 것이다.

 `가락국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만전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설명이 나오는 걸 알 수 있다. "수로왕이 길잡이를 데리고 와서 종궐 아래 서남쪽으로 육십 보쯤 되는 산의 변두리에 장막궁전을 치고 기다렸다"(率有司動 從闕下西南六十步許也 山邊設 殿祗候)는 대목의 `장막궁전`이 바로 만전인 것이다. 이렇게 왕후사의 위치가 만전과 같은 곳이라면, 만전은 현재의 주포마을에 자리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수로왕이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을 마중하러 간 곳이 별포(別浦)인데 이곳이 나중에 허황옥이 온 것을 기념해 공주의 포구인 `주포`(主浦)로 불렸고, 또 수로왕의 `님`이 오신 포구라 해서 `님개`로도 불렸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만전은 공주를 위해 이름 지었던 명월산 아래 주포마을에 있었던 것이 된다.

 <가락국기>에는 왕후사의 창건뿐 아니라 폐사 관련 내용도 나오는데, 이 대목에서 위치에 대한 추가적인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이로부터 이 절(왕후사)이 생긴 지 오백 년 후에 장유사를 세웠는데 이 절에 바친 농토와 산이 300결이나 되었다. 이에 장유사의 삼강(三剛)은 왕후사가 장유사의 시지(柴地-관할권) 동남쪽 구역 안에 있다 하여 절을 폐하고 농장을 만들어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는 장소와 말과 소를 치는 마구간으로 만들었으니 슬픈 일이다." 이 기사에서 왕후사는 장유사의 시지 동남쪽이라 나오므로, 당시 장유사 위치를 알면 왕후사의 위치를 규명하는데 한 발 더 가까이 갈 수 있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장유사의 위치를 현재 장유사 자리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최근 발굴된 `대청동사지`가 옛 장유사 후보지로 유력해 보인다. 왜냐하면 2020년 김해시 의뢰로 진행된 대청동사지 발굴의 결과가 옛 기록과 부합하기 때문이다. 장유사의 창건에 대해 <가락국기>는 고려 광종대(952년), 주세붕의 <장유사 중창기>는 신라 애장왕대(800~809)라고 말하고 있는데 대청동사지에서는 이들 시기와 부합하는 건물지와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현 장유사이든 대청동사지이든 그곳에서 보면 주포마을은 정확하게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거리가 꽤 떨어져 있지만 300결(약 140만 평)의 땅을 소유한 본사(本寺) 장유사에서 말사(末寺)인 왕후사는 충분히 관리 가능한 거리에 자리했던 것이다. 지금도 부산 범어사의 땅이 김해에도 있고, 통도사의 땅이 밀양에 있기도 하기에 옛 장유사에서 주포의 왕후사를 관할한 것은 별문제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왕후사는 시조모를 기리는 후손 질지왕의 효심으로 창건된 사찰이며, 수로왕과 허왕후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중요한 장소이다. 비록 세월의 흐름 속에 유적을 찾는 과정은 쉽지 않지만, 가야시대에 실재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왕후사의 역사적 의미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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