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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탐방]불신 시대
[춘추탐방]불신 시대
  • 이광수
  • 승인 2021.11.14 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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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1957년 8월 고 박경리 소설가는 <현대문학>지에 단편소설 <불신시대>를 발표했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있게 드러낸 소설이다. 대하장편소설 <토지>의 주제처럼 여성의 비극적인 운명을 다루고 있다. <불신 시대>는 한국전쟁휴전협정 전후 주인공 진영이라는 여인이 겪는 개인적인 고통, 슬픔, 외로움,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에 빠진 한국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이 소설제목이 암시하듯이 양대 진영이 대립하는 사회는 모두 그녀를 기만하고 배신하는 불신사회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 시대가 처한 환경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타락하는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해 비판하고 있다.

 내년 3월 9일이 제20대 대통령선거일이다. 여야 대통령 후보가 확정되어 120일간 피 말리는 선거유세전이 펼쳐질 것이다. 어느 정치평론가가 `정치판은 시궁창과 다름없다`고 혹평했듯이 온갖 흑색선전과 마타도어가 난무할 것이다. 선진국과 개도국을 막론하고 정치권력의 속성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 쟁취가 최종 목표다. 여기에 진영의 정치가 선거를 왜곡시킬 수 있다. 특히 SNS 전성시대를 맞아 사실을 오도한 가짜뉴스로 유권자들이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개연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정치 고단수들이 편 가르기로 결집에 나서면 유권자들은 적대적 정치의 공고화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다. 정치 불신의 폐해는 거짓말을 참말로 조작해 여론을 호도한다는 점이다. 미래의 비전과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뽑는 선거가 물질적 이익과 권력에 탐닉한 무리들에 의해 날조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전 미국대통령이 재직 중에 한 거짓말은 워싱턴포스트지 팩트체커(fact checker) 팀 3명에 의해 낱낱이 폭로되었다. 1267일 동안 무려 2만 55번의 허언과 오도된 주장을 SNS를 통해 했다는데, 이는 하루 평균 15.8회, 1년에 5767회나 거짓말을 한 셈이다. 미국의 살아있는 사법부와 언론정의에 인해 그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선거 후유증은 상처투성이로 남아 정치 불신과 국론분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불신 시대는 바로 정치지도자들이 내뱉는 진실을 가장한 거짓말에서 비롯된다. 우리 국민 87%가 정치인을 불신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보듯이 정치지도자에 대한 국민 불신은 최악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정치인의 거짓말에 대해 `숱한 거짓말로 신중히 은폐되거나 단순하게 망각되고 부정되어 그 위험성이 항상 존재한다`고 했다. 이는 거짓말과 가짜뉴스가 일상화된 정치현실 속에서 삶을 영위하는 현대인의 왜곡된 일상을 고발하는 지성의 목소리이다.

 우리 사회가 불신으로 팽배한 것은 정치 불신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대표적인 말이 `내로남불`이다. `내로남불`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준말이다. 이 정부 들어서서 가장 유행한 정치 불신 용어이다. 물론 90년대 중 후반기부터 유행한 `내가 하면 숙달운전, 남이 하면 얌체운전`, `내가 못생긴 건 개성, 남이 못생긴 건 원죄`, `내가 하면 오락, 남이 하면 도박`, `내가 땅을 사면 투자, 남이 땅을 사면 투기`, `내가 하면 예술, 남이 하면 외설` 등 다양한 형태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어왔다. 그 중 `내가 땅을 사면 투자, 남이 땅을 사면 투기`는 이 정부 들어서서 가장 뜨거운 `내로남불` 이슈로 등장했다. 지금 정치인들의 부동산투기 의혹과 대장동 개발 특혜사건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할 것이다.

 `내로남불`은 자기보호라는 방어기제의 발동이다. 이 말의 부정적 심리가 국민의 삶을 좌지우지하는 정치권에서 타성적으로 반복 재현됨으로써 사회분열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그 밖에 사법정의의 추락과 재판 불신, 공약(空約) 남발과 잦은 정책변경, 엽관제(spoil system) 난무, 프로파간다(선전선동)와 포플리즘(인기영합주의)의 만연은 정부에 대한 국민 불신을 증폭시키는 심리기제로 작용하고 있다. 불신의 가장 큰 해악은 불신이 불신을 낳아 인간관계를 경직시키고 사회적 고립을 심화시킨다는 점이다. 우리가 기적적으로 선진국대열에 합류했지만, 압축경제성장의 부작용으로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세계 최저 합계출산율(0.83)에 자살률, 노인빈곤율 세계 1위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이런 풍조 속에 신뢰를 바탕으로 유지돼야 할 부부관계에서도 각자 휴대폰의 비번잠금장치가 상식화된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프라이버시 존중이냐, 불신 시대의 상징이냐`는 각자 양심에 맡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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