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0:31 (금)
도산서원의 `쥐구멍의 지혜`
도산서원의 `쥐구멍의 지혜`
  • 허성원
  • 승인 2021.11.09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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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원의 여시아해 (如是我解)
허성원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허성원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퇴계 이황 선생을 모신 도산서원(陶山書院)에는 본관인 전교당의 한편에 관리자들이 거처하는 고직사(庫直舍)가 있고, 그곳에는 곡식 등을 보관하는 곳간이 여러 개 있다. 그 곳간들의 문짝에는 특이한 것이 있다. 문이 닫히면 아래쪽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구멍이 생긴다. 그것은 쥐구멍인 동시에 고양이 구멍이라고 해설가가 설명한다. 쥐가 들락거리며 곡식을 탐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동시에, 쥐를 잡는 고양이도 들락거리며 제 소임을 다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라는 말이다.

 잠시 갸우뚱 혼란이 오는 듯했지만, 금세 그 대단한 지혜에 무릎을 치게 된다. 쥐는 천성적으로 먹을거리만 있는 곳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든 반드시 쥐구멍을 만들어 침투하기 마련이다. 하물며 나무와 흙으로 지은 곳간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좀 오래된 곳간은 담벼락과 바닥 심지어는 천장까지도 온통 쥐구멍 투성이다. 쥐를 막아보겠다고 빈틈없이 단단히 막으려 들면 그럴수록 쥐구멍은 오히려 더 많이 생기게 된다.

 쥐의 출입을 철저히 막아보겠다는 방어 전략은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일단 쥐들이 어떻게 해서든 쥐구멍을 뚫어 곳간에 침투하기만 하면 이제 그곳은 자기들의 세상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쥐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구조가 쥐의 천적인 고양이의 출입을 더 확실하게 막아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산서원은 아예 문짝에다 구멍을 넉넉하게 뚫어두었다. 쥐들은 당당하게 앞문을 통해 들락거릴 수 있으니 굳이 수고롭게 따로 구멍을 낼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 구멍은 고양이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여유롭기 때문에, 고양이는 수시로 곳간에 들어가 쥐를 잡아야 하는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다.

 이제 곳간은 쥐와 고양이, 톰과 제리의 에코시스템이 구축된다. 생존을 위해 곡식을 탐하는 쥐와 그 쥐를 잡는 포식자가 공존하는 명실상부한 정글 생태계가 구현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잔인한 살육의 현장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 아무리 쥐가 많아도 고양이의 포식이나 사냥 능력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쥐의 입장에서도 포식자인 고양이가 버젓이 존재하고 있으니 극도로 절제된 도둑질을 할 수밖에 없다. 결국 곳간 안은 사자와 임팔라가 공존하는 평온한 아프리카 초원과 같은 모습이 될 것이다.

 그렇게 곳간은 쥐구멍이 없이 오래도록 깨끗하게 유지될 수 있다. 인간은 `구멍`을 내주어 약간의 곡식을 축내는 정도의 적선을 베풀고, 그를 통해 곳간의 평온과 청결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는 바로 인위를 최대한 배제한 무위자연의 실천이며, 막음이 아닌 흐름의 철학을 채택한 지혜라 할 것이다.

 막을 것인가 흐르게 할 것인가. 요(堯)임금은 홍수가 하늘에까지 차올라 산을 무너뜨리고 언덕을 침수시키자, 곤으로 하여금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게 했다. 곤은 천제의 식양(息壤)을 훔쳐 제방을 쌓아 물의 흐름을 막았다. 점점 자라는 땅의 괴물인 식양으로 구축된 거대한 제방은 물을 일시 가둘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빠져나가지 못한 물은 더욱 큰 홍수 피해를 가져왔다. 이에 요임금의 뒤를 이은 순(舜) 임금은 곤을 처형하고 그의 아들 우(禹)에게 그 아비의 일을 잇게 하였다. 우(禹)는 제방을 쌓기보다는 물이 흐르는 물길을 내었다. 산과 내의 편의에 거스르지 않도록 물길이 서로 통하게 함으로써 홍수를 다스렸다. 그 공으로 우는 순임금의 뒤를 이어 천자에 올랐다. 사기 하본기와 산해경 등에 언급된 이야기이다. 곤의 `막음의 치수`는 실패했지만 우의 `흐름의 치수`는 성공하였다.

 주나라의 백규(白圭)가 "저의 치수는 우(禹)보다 낫습니다"라고 말하자, 맹자가 말했다. "그대가 잘못 알고 있소. 우의 치수는 물의 도(道)에 따랐소. 그래서 우는 사해(四海)를 물웅덩이로 삼았지만, 그대는 이웃 나라를 물웅덩이로 삼았으니, 물이 거꾸로 흐르게 되는 것이오. 이는 홍수가 되어 범람하니 백성을 아끼는 사람이라면 좋아할 수 없는 일이오." 맹자(孟子)에 나오는 `이린위학(以隣爲壑, 이웃을 물웅덩이로 만들다)`이라는 고사이다.

 풍선은 한쪽을 누르면 다른 곳이 불거져 나온다. 이런 풍선효과처럼, 세상사는 한 곳이 막히면 반드시 다른 곳에서 혹은 다른 모습으로 불측의 다른 문제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니 막지 말고 흐르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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