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역사학계가 뜨겁다. 그 근원을 살펴보니 최근 7개의 가야 고분군 유네스코 등재를 앞두고 불거진 남원의 `기문국`과 합천의 `다라국` 명칭 문제로, 소위 강단 사학계와 민족 사학계가 불꽃 튀는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논쟁의 핵심은 `임나 소국의 위치`와 `가야는 임나이다`라는 두 가지 명제이다.
그럼 민족 사학계와 달리 주류 강단 사학계가 주장하는 `가야는 임나다`라는 <가야, 임나설>에서 항상 인용하는 근거를 살펴보고 그 주장이 타당한지 알아보자.
학계에서 항상 인용하는 국내의 근거 중 하나가 창원 봉림사지에 있는 진경대사비문의 `임나왕족(任那王族)`이란 기록이다.
비문의 내용은 [~大師諱審希俗姓新金氏 其先任那王族草拔聖枝 每苦隣兵投於我國遠祖興武大王 / 鼇山稟氣鰈水騰精 握文府而出自相庭 携武略而高扶王室~]이다.
풀이하면 "①.대사의 이름은 심희요, 속성은 신(新) 김씨이고 그 선조는 임나왕족 <초발성지>인데 매번 주변국 병사들에게 괴로움을 받다가 우리나라의 먼 조상 흥무대왕에게 투항하였다. ②.(흥무대왕)은 오산의 정기를 받고 동해의 정기를 타고서 문부를 쥐고 재상의 집안에 태어나 무략으로 왕실을 높이 떠받들었으며~"이다.
①.진경 대사의 조상은 임나의 왕족 `초발성지`인데 나중에 신라의 윗대 조상인 흥무대왕 김유신에게 항복하였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초발성지(草拔聖枝)가 진경대사 선조의 인명(人名)인 줄 모르고 "풀을 뽑고 성스러운 가지를 길러"라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초발(草拔)의 성스러운 가지(자손)"으로 해석하면 문맥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워진다. 왜냐하면 진경대사의 선조가 `초발의 후예`라면 당대의 고승인 그의 비문에 반드시 `시조(始祖) 초발`이라고 기록하거나 `초발의 신성한 후예 누구`라고 이름을 말했을 것인데 그런 구체적 언급은 일체 없기 때문이다.
또 끊어 읽기를 잘못하여 초발성지가 김유신이 아닌 아국(我國) 신라에 투항하였다고 하면 신라(我國)의 먼 조상 김유신을 진경대사의 조상인 임나국 왕족의 후예로 오해하게 된다. 그러나 김유신의 탄생은 서기 595년이고 가야는 이미 63년 전인 532년에 멸망하고 없었다. 가야와 임나가 같은 나라이면 가야가 멸망하면 당연히 임나도 없어야 한다.
그래서 김유신은 신라의 윗대 조상일 수는 있으나 임나왕족 후예인 진경대사의 임나국 선조는 더더욱 될 수 없다. 그리고 진경대사가 김유신의 직계 후손이라면 비문에 당연히 위대한 조상인 흥무대왕의 몇 대손이라고 자랑스럽게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또 임나와 가야가 같은 나라이면 `임나(가야) 왕족 초발` 또는 `김초발`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김씨 성(姓)이 아닌 가야(임나) 왕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草拔(쿠사나기)이든 草拔聖枝(쿠사나기 세이에)든 모두 김씨 왕족의 가야가 아닌 왜계 임나의 이름들이며 우리의 정서는 전혀 아니다.
그리고 ②.번 해석의 `오산의 정기 운운`하는 부분의 주어가 생략되어 있지만 주어는 우리나라(신라) 윗대 조상인 흥무대왕 김유신이다. 그 이유는 앞 문장의 목적어인 흥무대왕이 뒷문장에서도 바로 나와 반복되기 때문에 주어를 생략한 것이다.
한편 진경 대사 속가의 성이 신 김씨가 된 것은 그 선조 초발성지가 김유신에게 항복하고 난 후 신라의 왕에게서 김씨라는 새로운 성을 하사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초발성지는 일반 평민이 아니라 이웃 섬나라 임나의 고귀한 왕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초발성지의 출신지 임나는 한반도가 아닌 대마도와 일본 열도에 존재하는 소국쯤이며 가야사 학계가 주장하는 김해가 아니다. 또 가야의 역사나 왕력에도 초발이나 초발성지라는 인물은 없으며 동일한 이름의 가야 왕족이 주변국인 백제의 군사로부터 괴로움을 당해 신라로 투항해 왔다는 기록도 없다.
아직도 학계는 이병선 교수의 <임나 대마도설>이나 북한학자 김석형의 삼국과 가야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뛰어넘는 연구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현재 학계는 가야와 다른 나라인 임나의 왕족 `초발성지`를 잘못 해석하여 가야의 후손 김유신을 엉뚱하게 임나왕족의 후예로 오인하는 실수를 하고 있다. 또 가야의 옛 땅 김해를 임나로 잘못 확정하고 있다. 학계는 진경대사 비문의 해석을 신중히 재고하기를 바란다.
학계가 지금 <가야, 임나설>의 근거로 드는 진경대사 탑비는 결코 가야가 임나라는 근거가 아니라 오히려 가야와 임나는 전혀 다른 나라임을 말해주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고대에 멸망한 나라의 이름이 그 지역에 그대로 국명 또는 지명으로 남는 것은 고대사의 ‘상식’일 정도로 흔한 일임. 서기전 108년에 망한 ‘조선’이 서기 3세기에도 남아 있고(삼국지 동이전), 3~4세기대에 망한 ‘부여’[북부여]도 5세기에 누차 언급됨(광개토왕비문, 모두루 묘지명).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금관국은 532년 멸망부터 680년까지 근 150년간 금관군이라 불렸고, 아시량국(아나가야)도 6~8세기 동안 아시량군(아나가야군)이라 불렸고, 대가야도 562년 멸망부터 8세기까지 대가야군이라 불림. 임나와 가야가 멸망 후 바로 없어졌다는 주장은 상식에 벗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