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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방담]조선이 버린 천재 탁영자 김일손
[춘추방담]조선이 버린 천재 탁영자 김일손
  • 경남매일
  • 승인 2021.10.31 2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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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이광수

 요즘 한국의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세계인들을 매료시키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가히 한류신드롬의 선봉장이 된 느낌이 든다. 60여 년 전 필자가 어릴 때 즐겼던 딱지치기, 달고나 뽑기, 술래잡기 등의 한국 전통놀이를 세계인들이 따라 하며 흉내 내고 있다니 참 신기하다. 최근 한국인의 창조적인 아이디어로 만든 웹툰이나 전자게임 등은 이미 그 원조인 일본을 추월해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어디 그뿐이랴.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한국의 천재들이 펼치는 눈부신 활약은 K-POP 바람으로 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키고 있다. BTS와 블랙핑크를 비롯한 아이돌 그룹은 수억 명의 팔로워를 거느리며 인기 고공행진 중이다. 흥과 가무에 능한 우리 민족고유의 특성에 기인한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발상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한 각종 프로스포츠와 문화예술계에서도 세계무대에서 한국인의 우수성을 발휘하며 주목받고 있는 천재들이 많다. 이는 우리나라가 문화사적으로 독창적인 문자인 한글을 창제함으로써 세계적으로 빼어난 민족임을 인증받은 것에서도 증명된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역사를 반추해 보면 타고난 천재성을 제대로 발휘해 보지도 못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재들도 무수히 많다. 천재적인 기질을 타고 혜성처럼 나타났으나 정치ㆍ사회, 경제 등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 빛을 보지 못하고 요절한 천재들의 일생은 무척 비극적이다. 특히 이조 500년 동안 권력다툼의 희생양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명현들의 짧은 생애는 역사기록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고려 500년의 왕씨 왕족을 역성혁명으로 전복하고 건국한 이씨조선 시대엔 숭유정책으로 수많은 천재명유들이 배출되어 문명강국의 위상을 여지없이 발휘했다.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겠지만 신념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대에 맞섰던 천재들의 삶을 상고해 보면 우리나라가 민주화된 선진국이 된 근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조 세조 10년~연산군 8년 사이에 살다간 탁영자 김일손은 김종직의 문인인 집의 김맹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 역시 아버지를 따라 영남사림파의 종주인 점필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다. 김굉필과 `소학동자`로 지칭할 만큼 가깝게 지냈다. 16세에 사마시 진사에 차석으로 합격했으나 대과에는 낙방했다. 23세 때 밀양으로 내려와 살면서 사마시 생원시에 장원, 진사시에 차석으로 합격해 그해 대과문과에 응시해 차석으로 급제한 천재였다. 그는 홍문관, 예문관, 승정원, 사간원 등에서 전장, 검열, 주서, 정언, 감찰, 지평 등 언관(言官)과 사관(史官)의 핵심요직을 맡으면서 적극적이고 강직한 사림파 학자의 면모를 보여 주었다. 15세기 후반 조선의 정치는 기성세력인 훈구파와 신진 대항세력인 사람파의 대결장이었다. 이때 김일손은 김종직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소장 영남사림파의 리더로 활약했다.

 그가 사관으로 있을 때 훈구파의 종주인 이극돈의 비행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스승인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다. 사초는 실록에 오르기 전에는 비밀에 부쳐야 하는데 반대파인 훈구파 이극돈이 몰래 사초를 열람하여 발생한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조의제문`은 선왕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것을 부정적으로 보고, 진나라 말 숙부 항우에게 살해당한 초나라 의제를 조문한 글로 이것은 바로 세조의 단종시해를 중국의 사례로 비판한 글이다. 사초에 자신의 비리까지 기록된 것을 알게 된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사초내용을 삭제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일손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간신 유자광과 결탁한 이극돈을 비롯한 훈구파는 연산군에게 주청해 선대왕 세조를 능멸한 죄를 물어 무호사화가 터졌다. 이에 따라 김종직은 사후 부관참시 되고 사림파는 일망타진되었다. 연산군은 사초에 연루된 김일손, 권오복, 권경두 등을 능지처참(陵遲處斬)하고, 표연말, 정여창, 최부, 김굉필 등 김종직 문인들을 대거 유배 보냈다. 무오사화의 매서운 칼끝은 35세의 천재 유학자 김일손의 짧은 생을 마감하게 하였다. 그가 처형될 때 냇물이 갑자기 붉은 빛으로 변해 3일간 흘렀다고 하여 자계(紫溪:붉은 시내)라 명명하고, 그를 배향(配享)한 사당이름도 자계사(紫溪寺)로 지었다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은 `살아서 서리를 업신여길 절개가 있었고, 죽어서는 하늘에 통하는 원통함이 있었다`고 탄식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의 호(號) 탁영자(濯纓子)는 `갓끈을 씻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초나라 충신 굴원의 <어부사> 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라`는 시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중종반정 후 김일손은 복권되어 문민공(文愍公)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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