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4 05:54 (수)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발견 ④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발견 ④
  • 도명 스님
  • 승인 2021.10.25 21: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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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허황옥 공주가 수로왕과 결혼하기 위해 오신 길은 여러 지명들로 쭉 이어져 있다.

각 지명들은 그것이 생겨난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그녀의 흔적이 남아있는 나머지 지명은 다음과 같다.

능현(綾峴)

능현은 공주가 이 땅의 산신에게 비단바지를 폐백했다는 헌공의식의 공간이다. 그곳은 전망이 트여 주위가 잘 보이며 헌공의 대상인 보배산도 잘 보이는 곳이라야 한다.

능현의 현(峴)과 승재의 재(岾)가 `고개`라는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능현이 곧 승재(승점)로 보여지며 현재 가주동 관음사 뒤편의 고개이다.

공주가 오기 이전에 승재라는 지명이 있었고 수로왕은 신귀간에게 승재로 가라고 하였다. 시간이 지나 허왕후가 서거한 후 수로왕은 그녀가 폐백한 지점을 능현이라 이름 지었는데 이때 승재는 능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가락국기>에는 비단바지를 벗은 높은 언덕을 능현이라 했기에(高岡曰綾峴) 곧 승재(乘岾), 고강(高岡), 능현(綾峴)은 동일한 지점으로 볼 수 있다.

만전(幔殿)

만전은 유궁(帷宮)이라고도 한다. 수로왕이 공주를 맞이하기 위해 종궐 서남쪽 60보쯤 아래에 만든 임시 장막궁전이다. 만전은 공주의 환영사절 거절에 당혹스럽기도 한 수로왕이 아랫사람들을 인솔하여 급히 지은 곳인데 당시 주포마을의 중앙쯤에 있었던 종궐의 서남 60보 아래 산기슭이다. 그 위치는 현 주포마을의 좌측 산기슭 어디쯤으로 보여진다. 학계에서는 대개 수로왕을 북쪽 출신의 유목민으로도 보는데, 수로왕이 만전을 설치했다는 것은 이 지역의 문화라 하기보다는 유목민족의 전통문화로 이해되는 장면이다. 훗날 서기 452년 8대 질지왕이 두 사람이 합혼한 것을 기념하여 만전 자리에 왕후사를 창건하게 된다.

기출변(旗出邊)

기출변은 망산도에서 공주의 배가 처음 목격된 바닷가를 말한다. 유천간에 의해 공주의 배가 망산도에서 관측될 때 서남쪽 모퉁이에서 갑자기 배가 나타나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했는데, 그 서남쪽 모퉁이가 가덕도 북서쪽 끝 지점 해안이다. 지금의 지도에서 보자면 가덕도 서북단의 동리산(洞理山) 서남쪽 아래에 있는 옛 지명인 고직말(古直末) 쯤이된다. 좀 더 크게 보면 가덕도 북서쪽 해안 전체를 가리킬 수도 있다.

전산도(前山島)가 망산도로 바뀐 이유

「가락국기」에는 "이러한 중에 다시금 `수로왕을 사모해서 하는 놀이`가 있으니, 매년 7월 29일에 토착인과 서리, 군졸들이 승재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놀다가, 동ㆍ서로 눈길을 찡긋 보내면 건장한 인부들이 좌우로 나누어, 한편은 망산도에서 고라말을 급히 몰아 육지로 달리고, 또 한편은 익새배를 둥둥 띄워 물을 서로 밀쳐내면서 북쪽을 가리키던 옛 포구에 먼저 닿는 내기를 하니, 대개 이것은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급히 수로왕에게 아뢰던 옛 자취이다."라는 구절에 나온다.

위의 승재와 망산도 기사는 유천간 신귀간이 수로왕에게 허왕후의 도래를 알렸던 일들이 후대에 민속놀이로 발전한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처음에는 허왕후가 도래했던 외항의 주포 근처의 승재와 망산도에서 놀이가 행해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해수면의 하강과 자연적 매립 등의 환경적 요인으로 주포는 포구의 역할이 여의치 않아져 민속놀이가 내항인 수도 쪽으로 옮겨왔던 것 같다.

그래서 놀이의 중심지점이 현 김해시청이 들어서 있는 남산 쪽으로 옮겨왔고 놀이할 때 전산도를 망산도로, 승재는 남산의 어떤 지점으로 비정한 것으로 보여진다.

위 기사에는 말들이 망산도로부터 출발하여 육지를 달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말들이 달리려면 망산도가 섬이 아닌 육지라야 할 것이다.

옛 김해만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육지화되어서 간조 때에는 비록 질척거리는 상태이나마 망산도라 비정했던 전산으로부터 말이 달렸고, 배는 물길을 따라 승점으로 비정한 지점으로 향하여 노를 저어 서로 경합하였던 것이다.

놀이할 때 망산도를 현재의 전산으로 지명을 이전한 것은, 전산이 간조 때가 되면 섬과 육지의 양면성을 지녀서 배와 말이 경주 할 수 있는 조건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놀이문화 때 임시로 정한 지명이 지역민들에 의해 고착화 되었고, `대동여지도`를 작성한 김정호는 지역민들이 전하는 그대로를 표기했을 뿐이다. 다만 이러한 전후의 사정에 대한 문헌이나 구전이 없어 이후 연구자들이 도래경로에 대한 혼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지명은 대개 한곳에서 오랫동안 존속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역사에서 보면 가끔 지명의 이동은 일어났고 이것을 통해 전산이 망산도라 불린 것을 추정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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