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20:56 (금)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발견
`허황옥 신행길`의 새로운 발견
  • 도명 스님
  • 승인 2021.10.04 22: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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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허왕후가 이 땅에 오기 전 그녀의 이름은 허황옥이었고 그녀가 결혼을 위해 온 길을 신행(新行)길 또는 혼인길이라고 한다.

그녀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가락국까지 온 길에 대해 여러 이설(異說)이 있는 것처럼 그녀가 가락국 초입에 있는 진해 용원의 유주지에 도착한 후 본궐에 오기까지의 과정과 지명에 대해서도 학설이 다양하다. 그러나 그녀가 이 땅에 온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가락국기`의 기록과 현재까지도 전해오는 지명뿐 아니라 700만 가락 김씨의 시조모(始祖母)인 허왕후의 존재 때문이다.

허황옥 도래의 사실적 규명은 가야의 초기 역사를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가 될 수 있다. 그만큼 허황옥 공주의 도래길은 가야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허황옥 신행길에 대한 연구는 강단의 사학계와 향토사학계에서도 오랫동안 연구가 진행됐지만 모두가 인정할만한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사실 필자는 역사를 전공했거나 전문적 지식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허황옥 신행길을 연구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연구한 신행길에 대한 소회를 밝히고자 한다.

세계 역사계나 과학계에서 보면 소위 `재야`라고 하는 정식 학위가 없는 사람들이 가끔 잭팟을 터트리기도 하는데 예를 들자면 트로이를 발굴했던 독일의 재야 사학자 하인리히 슐리만이나 종의 기원과 진화론을 주장했던 영국의 찰스 다윈이 그 좋은 사례이다.

슐리만의 발굴이나 다윈의 발견은 인류의 고대사와 생물학의 흐름을 바꿀만한 대단한 업적으로 평가받는데 영국에서 다윈은 이제 뉴턴을 제치고 영국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는다고 하니 재야나 향토라는 명칭을 함부로 볼 수만은 없다 하겠다.

허황옥 루트와 가야불교의 경우를 보면 강단의 학계에서 김병모 교수님이 쌍어(雙魚)의 기원과 가야와의 연관성에 대해 괄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었으며, 향토사학자인 김해 금강병원 허명철 박사님은 허황옥이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에 대한 해체와 성분분석을 통해 파사석을 규명하고 탑의 원형을 복원하는 시도까지 했다.

가야의 발전이 수로왕의 대륙문화와 극성이 서로 다른 허왕후의 해양문화가 만나 가능했던 것처럼 앞으로 강단과 재야 사학계가 상호공조한다면 더 좋은 연구 성과물이 나오리라 보며 그러한 날을 또 고대해 본다. 우리의 뿌리를 찾고 나라의 근간을 바로잡는 역사바로세우기에 강단과 재야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서로에게 아무 이익이 없는 소모적 행위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제 각설하고 16세의 아리따운 인도 공주님이 해동 끝 가락국에 도착한 과정부터 수로왕과의 만남 그리고 본궐까지 발자취를 따라가 보겠다.

공주의 신행길을 규명하는 것은 몇 가지 논증이 필요한 부분이 있어서 조금 딱딱하고 건조해 보일 수 있으나 2000여 년 전 공주가 올 당시를 상상한다면 흥미로운 역사 탐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허황옥의 도착 일자와 경로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후한 건무 24년 무신(서기 48년) 음력 7월 27일 김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에게는 왕비가 될 사람을 마중하러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신귀간(神鬼干)에게는 `승점`(乘岾)에 가게 했다. 이에 망산도에서 기다리는 유천간의 눈에 비단 돛을 단 배가 천기-꼭두서니 문양의 깃발)를 휘날리며 갑자기 바다 서남쪽에서 모퉁이에서 나타났다. 훗날 천기가 들어 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이를 본 유천간 등이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렸고 배는 유주지(維舟址)에 정박한다. 수로왕은 공주를 기다리기 위해 주포(主浦, 원래는 별포) 마을로 갔고 별궁이었던 `종궐`(從闕) 아래 서남쪽 60보에 만전을 설치했다. 또 왕후는 산 바깥의 별포 나루 입구(別浦津頭)에 배를 맸으며 육지로 올라와 높은 언덕에서 쉬면서 입었던 비단 바지를 벗어 그것을 폐백 삼아 산신에게 바쳤다. 비단 바지를 바친 곳을 `능현`(綾峴)이라고 했다.

이렇게 공주의 이동 순서대로 각 지점을 나열하면 기출변, 망산도, 유주지, 승점, 별포진두, 능현, 만전, 종궐, 주포, 본궐이 자리하게 된다. 이들 10개 지점을 허왕후 도래 경로의 특정 장소로 보고 현재의 위치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가락국기> 원문에 나와 있는 이들 지점들을 가야불교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연구하고, 답사해 보니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허왕후가 오신 길이 아직도 면면히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과거의 제국은 사라졌지만 땅과 길은 오늘날에도 흔적이 남아 그 옛날의 기억을 속삭여 주고 있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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