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성 함락 위기 맞서 순절한 네 의병장 충절 기리다
김해성 함락 위기 맞서 순절한 네 의병장 충절 기리다
  • 경남매일
  • 승인 2021.09.07 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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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임진의병장

사충신 의병활동

③ 사충단에 대하여
김해시 동상동 161번지 분성산 중턱에 위치한 사충단의 전체 모습.
김해시 동상동 161번지 분성산 중턱에 위치한 사충단의 전체 모습.

임란때 송빈ㆍ김득기ㆍ유식ㆍ이대형 활약

1871년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묘단

의병 거느리고 싸우다 장렬하게 숨져

매년 음력 4월 20일 사충단서 추모제

1708년 송담사 건립 1833년 표충사 명명

사충단은 임진왜란(1592) 당시 김해성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한 네 의병장 송빈(宋賓, 1542~1592)), 이대형(李大亨, 1543~1592)), 김득기(金得器, 1549~1592), 유식(柳湜, 1552~1592))을 기리기 위해 1871년(고종 8) 고종의 명으로 건립된 묘단이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0년(선조 33)에 이들은 모두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에서 김득기와 이대형은 이조참판, 유식과 송빈은 호조참판으로 각각 추증(追贈)됐다.

사충단을 제외하고는 모두 1995년 당시 신축된 건물로 비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에 겹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집으로 비각 안에는 사충신이 추증받은 직함이 새겨진 비석이 있다.

조선 선조 25년(1592) 동래성을 함락한 왜적이 병력을 이끌고 김해성을 공격해 오자 당시 김해성의 주장군이었던 서례원이 김해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 때문에 김해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김득기ㆍ송빈ㆍ유식ㆍ이대형 의병장이 각기 의병들을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죽을 힘을 다해 싸우다 장렬하게 순절했다. 이것이 임진왜란 의병의 시작이 되었다고 전해 온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3년 만인 선조 33년(1600) 왕은 이들의 충절을 기리고자 각자의 벼슬을 올려 주었으며 숙종 34년(1708) 지방 사람들의 도움으로 ‘송담사’와 ‘송담서원’을 세워 이들의 위패를 모셔 두었다가 순조 33년(1833)에 ‘표충사’라 이름 지었다.

이후 고종 8년(1871)에 단을 설치해 ‘사충단’이라 이름 짓고 비를 세워두었으며 매년 음력 4월 20일을 제사 일로 정하여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사충단 입구.
사충단 입구.

사충단은 처음에 김해시 동상동 881-11번지(김수로왕의 왕비 궁터였던 연화사 포교당 앞)에 있었던 것을 동상동 227-6, 8번지로 강제 이전됐다가 구획정리에 의한 택지개발로 현재 위치인 동상동 161번지 분성산 중턱으로 이전되었고 특정일을 제외하고는 24시간 문이 꽁꽁 잠겨 있다.

사충단이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며 산으로 산으로 자꾸 밀려 올라가게 된 것은 왜적 때문이 아니라 특정인의 물욕 때문이었다는 것이 사충단을 아는 시민들의 주장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관군의 무력으로 인하여 일본군이 수십 일 사이에 우리의 국토와 죄 없는 백성들을 짓밟자, 동족을 구하고 스스로 자기 고장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일본군은 주요 도로를 따라 진격하면서 요충지에만 군대를 주둔시켰기 때문에, 일부 지역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지역은 왜적의 침략에 항거하는 민족적인 저항의 온상지가 되었고,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의병 신분 구성은 다양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져 있어, 의병 활동을 벌이는 기간에는 계급이나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의병장은 대개가 전직 관원으로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고 무인들은 소수였다. 그리고 덕망이 있어 자기 고장에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유생들도 있었다. 의병을 일으키는 데 적합한 곳은 일반적으로 대부분 자기가 자란 고장이나, 지방관으로 있을 당시 선정을 베풀어 그곳 지방민들이 잘 따를 수 있는 마을이었다. 이와 같은 조건을 갖춘 곳을 근거지로 하여 이를 확대, 더 넓은 지역에 걸쳐서 의병을 소모(召募)했고, 자연히 활동 무대도 넓어지게 되었다. 의병의 바탕을 이룬 것은 민족적 저항 의식이며 이를 촉발시킨 것이 의병장이었다. 또한 오랜 유교 교육을 통하여 유교의 도덕적 교훈인 근왕정신(勤王精神)이 깊이 뿌리를 내린 것도 의병 봉기에 있어서 무시할 수 없는 요인이었다.

의병의 활동 원칙과 규모

의병이 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무질서했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이정암(李廷?)은 황해도 연안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의병 자원자의 성명을 ‘의병약서책(義兵約誓冊)’에 기록하였다. 그리고 군율(軍律)로서 ① 적진에 임하여 패하여 물러가는 자는 참수한다[臨賊退敗者斬]. ② 민간에 폐를 끼치는 자는 참수한다[民間作幣者斬]. ③ 주장의 명령을 한 때라도 어기는 자는 참수한다[違主將一時之令者斬]. ④ 군기를 누설한 자는 참수한다[漏洩軍機者斬]. ⑤ 처음에 약속했다가 뒤에 가서 배반하는 자는 참수한다[始約終背者斬]. ⑥ 논상할 때 적을 사살한 것을 으뜸으로 하고, 목을 베는 것을 그 다음으로 한다[論賞時射殺者爲首斬首者次]. ⑦ 적의 재물을 획득한 자는 그 재물을 전부 상금으로 준다[得敵人財物者無遺賞給事]. ⑧ 남의 공을 빼앗은 자는 비록 공이 있다 해도 상을 주지 않는다[奪人之功者雖有功不賞事]는 8개 항목을 정한 것은 의병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1593년(선조 26) 정월에 명나라 진영에 통보한 전국의 의병 총수는 관군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2만 2600여 명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이 수는 의병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전해인 임진년(1592)에 비하여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그것은 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에 관군이 차츰 회복되어 의병을 절제하고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주어, 의병이 해체되거나 관군에 흡수되는 경향을 띠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이 컸던 의병장으로는 곽재우(郭再祐)ㆍ고경명(高敬命)ㆍ조헌(趙憲)ㆍ김천일(金千鎰)ㆍ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ㆍ정문부(鄭文孚)ㆍ이정암ㆍ우성전(禹性傳)ㆍ권응수(權應銖)ㆍ변사정(邊士貞)ㆍ양산숙(梁山璹)ㆍ최경회(崔慶會)ㆍ김덕령(金德齡)ㆍ유팽로(柳彭老)ㆍ유종개(柳宗介)ㆍ이대기(李大期)ㆍ제말(諸沫)ㆍ홍계남(洪季男)ㆍ손인갑(孫仁甲)ㆍ조종도(趙宗道)ㆍ곽준(郭?)ㆍ정세아(鄭世雅)ㆍ이봉(李逢)ㆍ임계영(任啓英)ㆍ고종후(高從厚)ㆍ박춘무(朴春茂)ㆍ김해(金垓)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에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다시 벼슬에 들어간 사람도 있으나, 왜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의병장도 있었다. 의병장의 대표적인 활약상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곽재우ㆍ김면ㆍ정인홍 등 경상도 의병

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은 왜군이 먼저 침입한 경상도 지역이며,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인물은 곽재우다. 그는 현풍 유생으로서 경상도 의령에서 1592년 4월 22일 10여 명의 가동(家童)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붉은 비단옷과 백마를 타고 스스로를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부르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는 사재를 털어 군자금으로 삼았고, 의병의 수가 증가하자 군무 분장의 참모진을 구성한 뒤 바로 임전 태세를 갖추었다. 처음에는 관가에 방치된 무기를 가져다가 의병에게 지급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게 되자 무기를 자체적으로 제조하여 보급하였다. 군량미도 처음에는 자신의 재곡이나 지역 부호들의 후원으로 해결했으나 그것만으로 부족하여 관곡으로 충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는 전략 기지로서 의령군에 위치한 세간리(世干里)와 정암진(鼎巖津)을 본거지로 삼았다. 세간리는 그가 처음 북을 치고 의병을 모집한 마을이었다. 이곳은 낙동강과 남강이 합치는 기강으로부터 멀리 북으로 창녕과 마주하는 낙동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였다. 그래서 낙동강을 이용하여 병력과 군수 물자를 운반하는 왜선을 차단하여 큰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그는 전라도로 향하는 왜적을 정암진에서 차단하여 적의 호남 진출을 저지하였다. 그리고 이반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이끌고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일본군과 싸워 적의 낙동강 통행을 막았다. 또 의령ㆍ삼가ㆍ합천ㆍ창녕ㆍ현풍ㆍ영산 등의 여러 고을을 수복하여, 경상우도가 그의 보호 아래 있었다.

곽재우와 더불어 경상우도에서 활약이 컸던 인물로 김면과 정인홍을 들 수 있다. 김면은 처음에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그곳이 적합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거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2000여 명을 모았다. 그는 명망 있는 사족들로 유사(有司)를 정하고 곽재우와는 달리 관군과도 협조하여 원만하게 의병을 운영하였다. 그는 남명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 사족 상호간의 중첩적인 통혼에 의한 유대관계, 서당이나 향교를 통한 교우관계 등을 바탕으로하여 백성들을 동원하였다. 그는 의병을 이끌고 거창ㆍ고령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관군과 합세하여 적의 선봉을 지례에서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또 무계(茂溪)에서도 승전했으며, 후에는 성주ㆍ김산(金山)ㆍ개령 부근에서도 왜적과 싸웠다. 정인홍도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성주에 침입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또 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ㆍ합천ㆍ함안 등지를 방어하였다. 경상좌도에서 기병한 권응수는 정세아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영천을 탈환하였다.

그리고 학연(學淵)ㆍ예천ㆍ문경 등지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여, 일본군이 몹시 두려워하고 그들과 만나 싸우기를 꺼려했다고 한다. 김해는 임진년 9월 예안(禮安)에서 일어나 경상도 북부지방을 제압하는 등 일본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하였다.

한상규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 학술이사
한상규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 학술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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