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08:20 (토)
여장부 허왕후의 위상
여장부 허왕후의 위상
  • 도명 스님
  • 승인 2021.08.30 23: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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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다. 그러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다`라는 말이 있다. 또 과거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는 광고 카피도 있었다. 물론 이런 말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나, 많은 이가 수긍하며 공감을 해왔다.

가야를 얘기할 때 건국자 수로왕과 함께 항상 언급되는 존재가 그의 아내 허왕후다. 옛 기록에 따르면 그녀는 10남 2녀의 자녀를 잘 기른 현모(賢母)이자 수로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게 내조한 덕스런 양처(良妻)였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까지 수로왕과 둘이서 백년해로한 영혼의 동반자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이 천여 년이 지난 지금도 허왕후의 삶은 많은 여성들에게 롤 모델이 되고 영감을 주고 있다.

허왕후, 그녀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녀가 처음 등장하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보면 신혼 첫날밤에 "저는 아유타국의 공주로서 성은 허이고 이름은 황옥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라고 자신을 먼저 소개하였다. 이러한 당당함은 그 전날 그녀가 이 땅에 처음 왔을 때 환영 나온 사절인 구간(九干)들을 바람맞히는 행동에서도 나타났다.

[마중을 나간 구간들이 `배를 돌려 대궐로 들어가자` 하니 왕후가 말했다. "나는 평소 그대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되돌아가서 왕후의 말을 전하니 왕이 옳게 여겨 임시 궁전을 만들어 놓고 기다렸다.] 이 당시 구간은 최고의 신하였고 조선 시대로 비유하면 삼정승 육판서쯤 되었을 것이다. 당시 수로왕도 모든 예우를 다해 최고의 환영사를 보냈지만 그녀의 높은 자존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도는 "나는 수로왕 당신을 만나기 위해 목숨 걸고 저 험난한 바다를 건너왔는데 왜 당신은 직접 마중 나오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느냐"는 일종의 시위였던 것이다.

지혜로운 공주는 이때 `내가 이렇게 행동하면 수로왕은 과연 어떻게 나올까` 밀당하면서 상대를 떠보았으리라. 나는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바다 건너 당신만 바라보고 오는데, 당신은 진정 나의 뜻을 존중하고 내 말을 들어줄 사람인지, 또 나의 평생 의지처가 될 사람인지 궁금했을 것이다. 이렇게 점잖으면서도 격 있는 핀잔에 수로왕도 즉시 알아듣고 "그렇다"하고는 바로 별포로 몸소 마중을 나갔었다. 재미있는 상상으로 해보면, 이때 만약 수로왕이 그녀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면 어찌 됐을까? 수로왕이 그녀를 `통발에 들어온 물고기`로 정도로 오판하여 `여자가 왜 이리 콧대가 세냐!` 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면 어찌 됐을까? 모르긴 해도 이후 그녀의 삶에서 비춰보면 그녀는 "배 돌려라, 목숨 걸고 온 여인의 마음 하나 알지 못하는 남자에게 내 인생을 맡길 수 없다. 고향으로 돌아가자, 배 돌려라!" 하였을 것 같다. 왜냐하면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의 기록에 의하면 허왕후의 위상은 왕비로서 내조만 한 것이 아니었고 `수로왕이 예를 갖추어 맞이하여 함께 나라를 다스린 지 150년이나 되었다`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허왕후가 오고 난 직후 수로왕은 옛 주나라의 법과 당시의 강대국인 한나라의 행정을 참고하여 국정의 기틀을 세우는데 왕후의 역할이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가야는 여성의 지위가 높았던 것으로 보이며, 고고학적 발굴에서 보이는 가야의 여성 무사 흔적은 그 좋은 증거로 보인다.

허왕후는 수로왕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나는데, 이때 수로왕은 몹시 슬퍼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이었다고 한다. 허왕후에 대한 수로왕의 지극한 사랑은 그녀의 흔적이 있던 곳을 지명으로 남긴 것에도 드러나 있다. 그녀가 처음 닻을 내린 마을을 `허황옥 공주`를 뜻하는 주포촌(主浦村)으로 하고 그녀가 시집올 때 이 땅의 신들께 자신의 비단 바지를 폐백한 고개를 능현(陵峴)이라 이름 지었다. 또 그녀의 배가 처음 목격되었던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보면 허왕후의 내조는 수로왕의 그녀에 대한 존중과 사랑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허왕후가 이 땅에 오기 300년 전에 인도를 최초로 통일한 아쇼카왕은 많은 나라로 불교 전법단을 보냈고, 왕자 마힌다와 공주 상가미타는 스리랑카에 최초로 불교를 전해 주었다. 그것을 전례로 하여 아유타국의 왕자 장유화상과 공주 허황옥이 불법을 전하기 위해 순교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지 않았을까.

흔히 실크로드라는 고대의 교류를 보면 먼저 옥과 비단의 상업 루트가 열리고, 그 다음에는 반드시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의 종교가 전파되는 과정이 법칙처럼 이어졌다.

그녀를 이 땅으로 오게 한 것은 사랑의 힘일까, 종교적 사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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