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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첫 의병장 송빈 “국난에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임진왜란 첫 의병장 송빈 “국난에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 경남매일
  • 승인 2021.08.24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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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임진의병장 사충신 의병활동② 사충신의 의병활동
한상규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 학술이사
한상규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 학술이사

김해성 방어 도총장 중군 임무 맡아

첫 교전에서 왜적 상대로 수백명 죽여

이대형ㆍ김득기ㆍ류식과 사충신 불려

적이 투항권고 회유 때 크게 꾸짖어

송빈 “나라 위해 죽을지언정”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김해성 전투에 참전한 첫 번째 의병장.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사신(士信), 호는 송담(松潭). 김해 출신. 할아버지는 절제사 송경(宋經)이고, 아버지는 절제사 송창(宋昌, 1633~1706)이다. 어머니는 진사 김태석(金泰碩)의 딸이다.

임진왜란 때의 첫 의병장이다. 4월 13일 부산이 함락돼 첨사 정발이 전사하고 15일에는 부사 송상현이 전사하였다.

정발(1553년, 명종 8)~1592년, 선조 25)은 무신으로본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판윤 정지례의 고손으로, 할아버지는 돈녕부도정 정세현(鄭世賢)이고, 아버지는 군수 정명선(鄭明善)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남궁숙(南宮淑)의 딸이다. 1577년(선조 10) 무과별시(武科別試)에 병과(丙科) 7위로 급제, 선전관이 되고, 곧바로 해남현감ㆍ거제현령이 되었다. 이어 비변사의 낭관이 되었으며, 위원군수ㆍ훈련원부정이 되었다. 1592년 절충장군(折衝將軍)의 품계에 올라 부산진첨절제사가 되어 방비에 힘썼다.이해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에 상륙한 왜병을 맞아 분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그도 전사하였다. 이때 첩 애향(愛香)은 자결하였고, 노(奴) 용월(龍月)도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충렬사(忠烈祠:뒤의 樂安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송상현(1551년, 명종 6)~1592년, 선조 25)은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부사맹(副司猛) 송승은(宋承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진용교위(進勇校尉) 송전(宋琠)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복흥(宋復興)이다.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김승석(金承碩)의 딸이다.

10세에 경사(經史)에 두루 통했으며 15세에 승보시(陞補試)에 장원하고 20세에 진사가 되었다.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보임되고, 저작(著作)ㆍ박사(博士)에 승임(陞任)되었다. 이후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에 임명되었다가 경성판관으로 나갔다.

1583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으로 들어와 예조ㆍ호조ㆍ공조의 정랑이 되었다. 이듬해부터 두 차례에 걸쳐 종계변무사(宗系辨誣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다시 지평이 되었다가 은계도찰방(銀溪道察訪)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다시 지평을 지내고 배천군수로 나갔다가 3년 만에 전직되어 경력(經歷)ㆍ집의ㆍ사간과 사재감(司宰監)ㆍ군자감(軍資監)의 정(正)이 되었다. 1591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동래부사가 되었다. 왜침의 소문이 들려오는 가운데 방비를 굳게 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14일 부산진성을 침범한 왜군이 동래성으로 밀어닥쳤을 때 적군이 남문 밖에 목패(木牌)를 세우고는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 하자 이 때 부사인 송상현이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고 목패에 글을 써서 항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뒤 적군이 성을 포위하기 시작하고 15일에 전투가 시작되었다. 군사를 이끌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으로 성이 함락당하자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덮어 입고 단좌(端坐)한 채 순사하였다. 왜장 소 요시토시[宗義智] 등이 송상현의 충렬을 기려 동문 밖에 장사지내주었다 한다.

송담서원은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784년(정조 8)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송담서원은 임진왜란 때 김해성을 사수하다 순절한 송빈, 이대형, 김득기의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784년(정조 8) 창건해 위패를 모셨다.

뒤에 이조판서ㆍ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산의 충렬사ㆍ개성의 숭절사(崇節祠)ㆍ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ㆍ고부의 정충사(旌忠祠)ㆍ청원의 충렬묘(忠烈廟)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이 함락되고, 다음날인 15일 동래가 적에게 넘어가자,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 ?~1593)은 당황하여 어찌할바를 모르자 송빈이 말하기를, “ 대장부가 나라를 위하여 죽을지언정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리오?” 하니 부사가 이 말을 듣고 김해성을 방어할 사람으로 송빈에게 도총장 중군의 임무를 주어 송빈이 앞장섰다. 당시 왜적이 죽도(강서구 가락)까지 침투하였다.

송빈과 의병, 적진서 장렬하게 전사

1585년(선조 18) 회령의 보을하진첨절제사(甫乙下鎭僉節制使)로 정탐의 임무를 띠고 두만강을 건너 오랑캐 땅에 깊이 들어갔으나 80여 명의 부하를 모두 잃고 패주한 죄로 종성(鐘城)에 수감되었다. 그 뒤 석방되어 김해부사로 있을 때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성을 수비하던 중 적이 보리를 베어다가 성의 높이와 같게 쌓고 쳐들어오자 패주하였다. 그 뒤 의병장 김면(金沔, 1541~1593)과 협력하여 지례의 왜적을 격퇴하고, 1차 진주성싸움에 목사 김시민(金時敏, 1554~1592)을 도와 왜적과 항전하였다. 김시민이 병으로 죽자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순찰사 김성일(金誠一, 1538~1593)에게 발탁되어 진주목사가 되었으나 이듬해 왜적이 재차 진주성을 공격해오자 성을 버리고 숲속에 숨어 있다가 살해당하였다.본래 힘은 세지만 어리석고 겁이 많아서 무장으로서 별다른 전공을 세우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형 서인원(徐仁元)이 명사(名士)였기 때문에 그 덕으로 요지의 변방을 지키는 장수가 되었다.

향우인 이대형(李大亨, 1543~1592)ㆍ김득기(金得器,1549~1592)ㆍ류식(柳湜, 1552~1592) 등과 함께 장정 수백 인을 모아 김해성으로 들어가 부사 서예원(徐禮元, ?~1593)을 도와 중군(中軍)을 맡았다.

4월 17일 북상하던 왜군의 한 부대가 김해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자, 야음을 기해 성밖의 적을 기습, 첫 교전에서 적 수백 명을 죽이고 김해와 부산 사이에 위치한 죽도까지 적을 추격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18일과 19일 전날의 참패를 설욕하려는 왜군이 대거 몰려오자 응원왔던 초계군수(草溪郡守) 이유검(李惟儉)이 서문을 지키다 먼저 달아나고, 뒤이어 부사 서예원마저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로 달아났다. 이에 분격한 송빈은 순수 의병만으로 영남의 곡창이며 요충지대인 이곳을 사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고 이끌고 들어온 장정들을 독려하여 일순도 그치지 않는 혈전을 계속하였다. 이날 밤 적은 성 주변의 보리는 물론 김해 넓은 들에 심어져있는 보리까지 베어 성 밑에 높이 쌓고 참호를 메워 성벽을 타고 넘어왔다. 이튿날인 20일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은 와해되었다. 적이 회유책으로 투항을 권고하자 크게 꾸짖고 남은 수명의 의병을 독전해 적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싸우다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서 송빈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마친 장정이 수백 인을 헤아렸다. 4월 17일에서 20일까지의 4일간에 걸친 김해성 싸움은 순수 의병과 의병 지휘자만으로 왜군과 싸운 임진왜란 최초의 격렬한 전투로 기록되었다. 더욱이 관군으로 버티던 부산과 동래가 하루만에 무너진 데 반해, 비록 왜군의 한 부대였다 해도 수나 장비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는 적과 대결하여 나흘 동안이나 버티었다는 것이 놀랍고, 특히 이후 7년간 걸친 싸움에서 의병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사충단(四忠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빈ㆍ김득기ㆍ류식ㆍ이대형 4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1871년에 건립한 묘단이다.
사충단(四忠壇)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김해성을 지키다 순절한 송빈ㆍ김득기ㆍ류식ㆍ이대형 4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고종의 명으로 1871년에 건립한 묘단이다.

송빈의 부하인 양업손(梁業孫)이 전사자의 시체더미 속에 숨어 있다 살아 나와 당시의 참상을 전해서, 이 날의 처절한 전투가 알려졌다 이에 평정이 완전히 이루어진 1600년(선조 33) 공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리고 1708년(숙종 34) 이순신(李舜臣, 1545~1598)의 현손인 부사 이봉상(李鳳祥, 1676~1728))이 ‘주지(州誌)’를 보다가 송빈의 공적을 발견하고 감격한 나머지 충렬사(忠烈祠)를 짓도록 건의, 송빈을 향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1871년(고종 8)에 부사 정현석(鄭顯奭)과 시인 송은성(宋殷成, 1836~1898)의 상소로 ‘사충단(四忠壇)’이 건립되어 향사되었다.

송담서원에 들어가는 경앙문.
송담서원에 들어가는 경앙문.

아울러 1875년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다. 순절하던 날 장대(將臺)의 벽에 적어놓은 송빈의 시는 충절단성(忠節丹誠)의 대표적인 시로 꼽히고 있다.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는 사충신의 호국 문화 유산의 조사, 보호, 보존, 활용 및 사충신과 관련된 연구를 합니다.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는 또한 사충신의 호국 문화를 계승 발전시키고 후세의 교육 및 호국 이념 창달에 공헌합니다.

‘김해임진의병장 사충신 의병활동’ 기획은 사충신호국사업기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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