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1:26 (목)
르네상스적 인물 김수로왕
르네상스적 인물 김수로왕
  • 도명 스님
  • 승인 2021.08.23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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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사 정 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인간은 문명의 발전과 함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인물을 탄생시켰고 또 이러한 인물들이 역사를 발전시키는 주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하였다.

가락국의 건국과 허왕후의 도래가 실려있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다양한 캐릭터 가운데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부각된다.

수로왕과 석탈해의 대결 장면에서 왕 자리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대해 "하늘이 나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명한 것은 장차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함이니, 감히 하늘의 명을 어겨 왕위를 남에게 줄 수 없고, 또 내 나라와 국민을 너에게 맡길 수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석탈해의 자신감 넘치면서도 오만한 도전에 대해 수로왕은 단호한 어조로 "나는 하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며 나라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게 나의 의무이다"(令安中國 而綏下民)라고 말하며 치국안민(治國安民)에 대한 철학을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삼국사기> `파사 이사금조`에는 수로왕의 또 다른 모습이 제시된다. 신라 파사 이사금이 자신이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수로왕께 청하여 주변국 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는 내용인데 짧은 글 속에서도 수로왕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23년(서기 102) 가을 8월 음즙벌국과 실질곡국이 국경을 두고 다투다가 왕에게 와서 판결을 청하였다. 왕이 처리하기 난처하여 `금관국 수로왕이 연로한데 아는 것이 많고 지혜롭다`하고는 초청하여 물었다. 수로왕이 의견을 내어 다투던 땅을 음즙벌국에 속하게 하였다. 이에 왕이 6부에 명하여 함께 (잔치를 열어) 수로왕을 대접했다." 이처럼 수로왕은 이웃 나라의 왕이 어려운 문제의 중재를 요청할 정도로 신뢰와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수로왕은 수행을 통해 인격을 고취했는데 <가락국기>에는 수로왕의 불교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도교적인 풍모도 느낄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이 땅은 협소하기가 여뀌잎과 같다. 그러나 수려하고 기이하여 가히 16나한을 머물게 할만한 곳이다. 더구나 1에서 3을 이루고 3에서 7을 칠성이 거처하기에 적합하니"라면서 수로왕이 직접 궁궐터를 점지하는 모습이 나오고, 자신의 배필이 될 허왕옥이 이역만리에서 올 것을 예견하는 장면도 나온다.

<삼국유사> `어산불영`의 다음 기록에는 "(가락국) 경내에 옥지가 있고 그 못에 독룡이 있었는데 만어산에 있는 다섯 나찰녀와 왕래하며 사귀었다. 그때마다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되지 않았다. 왕이 주술(呪術)로 이것을 금하려 하였으나 능히 금하지 못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부처를 청하여 (부처께서) 설법을 한 후에 나찰녀가 오계를 받았는데 그 뒤로는 재해가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처럼 수로왕은 각종 기록에서 풍수에도 밝고 미래를 보는 예지력이 있었으며 주술을 사용하는 영적인 힘을 갖춘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또 다른 기록인 <가락국 태조릉 숭선전비>에는 "(수로왕이) 인의를 숭상하고 겸양의 예의를 흥하고 하시었고 고아나 홀로 사는 홀아비나 과부를 불쌍히 여기셔서 구휼하셨다"는 자애로운 모습이 제시된다. 가야 시대에 이미 수로왕은 사회적 약자를 구제하는 사회복지를 실현했던 것이다.

<숭선전비>에는 수로왕 부부의 노후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왕이 되신지 121년에 스스로 (정무에) 권태를 느끼시고 황제가 신선이 되었음을 흔연히 사모하여 왕위를 태자 거등에게 전하고 지품천의 방장산 속에 별궁을 지어서 태후와 함께 옮겨 가서 수련을 하셨다" 수로왕은 나중에 왕후와 함께 지리산에 들어가 150세 이상 장수했는데, 이는 산 좋고 물 맑은 곳에 들어가 명상과 힐링을 한 수행생활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1973년에 죽은 아제르바이잔 출신의 시랠리 뮈슬리모프는 그 전 세기인 1805년에 태어나 168세를 살았는데 `타임지`에 따르면 그의 셋째 부인도 107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기록에 나오는 수로왕의 장수가 과장됐다는 주장이 많지만, 수로왕 부부가 일반인보다 오래 산 것도 가능한 이야기이다.

이처럼 수로왕은 위정자로서 유능한 통치자의 모습뿐 아니라 자애로운 국부(國父)의 모습도 있었다. 그는 때로는 지혜로운 중재자 역할도 하였고 진리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면모도 보였다.

이런 내용을 종합하면 수로왕은 결코 단순한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문(文)과 무(武), 지(智)와 덕(德)을 모두 갖춘 융ㆍ복합적인 성격의 `르네상스적 인물`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적 정체성은 그가 세운 가야의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천 년 전 열린 세상과 해양대국을 꿈꾸었던 고대인 김수로왕은 그때 이미 현대화된 국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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