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23:53 (목)
“금년에 김해읍성 쌓아…” 군사 요충지로 세종실록에 기록
“금년에 김해읍성 쌓아…” 군사 요충지로 세종실록에 기록
  • 한상규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 학술이사
  • 승인 2021.08.23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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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임진의병장 사충신 의병활동① 왜군의 침략과 김해읍성
한상규 한국선비정신문화연구원장
한상규 사충신호국기념사업회 학술이사

병조에서 김해읍성 쌓기를 간청

내이포에 360명가량 왜인 살아

“후환 막고자 먼저 도모하여야”

20만 군사ㆍ4만~5만척 배로 침략

임진왜란 당시 상황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보면 다음과 같다.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 4월 14일.1592년).

14일 왜적이 군사를 일으켜 부산진을 함락시켜 부사 정발과 송상현이 전사하다.

14일 왜적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침략해 와서 부산진(釜山鎭)을 함락시켰는데 첨사(僉使) 정발(鄭撥, 1553~1592)이 전사하고, 이어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면서 부사 송상현(宋象賢, 1551~1592)도 전사하였다. 평수길(平秀吉)이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명나라를 공격하는 길을 빌려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침내 여러 섬의 군사 20만을 징발하여 직접 거느리고 일기도(一岐島)까지 이르러 평수가(平秀家) 등 36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거느리게 하고, 대마 도주 평의지(平義智)와 평조신(平調信)ㆍ행장(行長)ㆍ현소(玄蘇)를 향도로 삼아 4만∼5만 척의 배로 바다를 뒤덮고 와 이달 13일 새벽 안개를 틈타 바다를 건너왔다. 부산에서 망을 보던 관리가 처음에 먼저 온 400여 척을 보고 주진(主鎭)에 전보(轉報)하였는데, 변장(邊將)이 단지 처음 보고받은 것을 근거로 이를 실제 수효로 여겼다. 그리하여 병사(兵使)가 장계하기를 ‘적의 배가 400척이 채 못되는데 한 척에 실은 인원이 수십 명에 불과하니 그 대략을 계산하면 약 만 명쯤 될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조정에서도 그렇게 여겼다.

김해읍성 성벽은 세종 16년(1434년)에 세워졌다. 성벽 둘레 길이는 약 1950m 이며 1910년 일제강점기 철거령으로 거의 철거되고 김해 동상동 818번지 일대에 북벽이 길이 20m, 높이 2.5m가 남아 있다. 사진은 김해읍성 북문. / 김해시
김해읍성 성벽은 세종 16년(1434년)에 세워졌다. 성벽 둘레 길이는 약 1950m 이며 1910년 일제강점기 철거령으로 거의 철거되고 김해 동상동 818번지 일대에 북벽이 길이 20m, 높이 2.5m가 남아 있다. 사진은 김해읍성 북문. / 김해시

부산 첨사 정발은 절영도(絶影島)에 사냥하러 갔다가 급히 돌아와 성에 들어갔는데 전선(戰船)은 구멍을 뚫어 가라앉히게 하고 군사와 백성들을 모두 거느리고 성가퀴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성을 백겹으로 에워싸고 서쪽 성 밖의 높은 곳에 올라가 포(咆)를 비오듯 쏘아대었다. 정발이 서문(西門)을 지키면서 한참 동안 대항하여 싸웠는데 적의 무리가 화살에 맞아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정발이 화살이 다 떨어져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자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다.

동래 부사 송상현은 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문을 듣고 지역 안의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를 불러 모두 몰고 성에 들어가 나누어 지켰다. 병사 이각(李珏)도 병영(兵營)에서 달려왔으나 조금 지나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겁을 먹고 어쩔 줄 모르면서 핑계 대기를 ‘나는 대장이니 외부에 있으면서 협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즉시 나가서 소산역(蘇山驛)에 진을 쳐야 하겠다’고 하였다. 상현이 남아서 같이 지키자고 간청하였으나 그는 따르지 않았다. 성이 마침내 포위를 당하자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했으나 반일(半日)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도왜(島倭) 평성관(平成寬)은 일찍이 동래에 왕래하면서 상현의 대접을 후하게 받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가 먼저 들어와 손을 들고 옷을 끌며 빈틈을 가리키면서 피하여 숨도록 하였으나 상현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적이 마침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성이 장차 함락되려고 할 때에 상현은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손수 부채에다 ‘포위당한 외로운 성, 달은 희미한데 대진의 구원병은 오지 않네, 군신의 의리는 중하고 부자의 은혜는 가벼워라[孤城月暈 大鎭不救 君臣義重 父子恩輕]’고 써서 가노(家奴)에게 주어 그의 아비 송복흥(宋復興)에게 돌아가 보고하게 하였다. 죽은 뒤에 평조신이 보고서 탄식하며 시체를 관(棺)에 넣어 성 밖에 묻어주고 푯말[標]을 세워 식별하게 하였다. 상현에게 천인(賤人) 출신의 첩이 있었는데, 적이 그를 더럽히려 하자, 굴하지 않고 죽었으므로 왜인들이 그를 의롭게 여겨 상현과 함께 매장하고 표(表)를 하였다. 또 양인(良人) 출신의 첩도 잡혔으나 처음부터 끝까지 굴하지 않자 왜인들이 공경하여 별실(別室)에 두었다가 뒤에 마침내 돌아가게 하였다.

임란 최초의 의병장 송빈(宋賓) 순절암.
임란 최초의 의병장 송빈(宋賓) 순절암.

송상현은 기국(器局)이 탁월하였으며 시(詩)를 잘하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경인년 에 간관(諫官)이 되고, 신묘년에 부사로 나갔는데, 실상은 배척당한 것이었다. 갑오년 에 병사(兵使) 김응서(金應瑞)가 울산(蔚山)에서 청정(淸正)을 만났을 때 청정이 그가 의롭게 죽은 상황을 갖추어 말하고, 또 집안 사람이 시체를 거두어 반장(返葬)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경내를 벗어날 때까지 호위하여 주었는데, 적에게 함락된 유민들이 길에서 옹위하여 울며 전송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아들 한 사람에게는 벼슬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서인(庶人)인 신여로(申汝櫓)가 상현을 따랐었는데 상현이 돌려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도중에서 부산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난리를 당하여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하고 도로 성으로 들어가 함께 죽었다고 한다.

김해읍성, 내이포 왜인 방비 논의

김해 읍성 공사를 처음으로 논의한 기록에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1일. 1434년) 병조에서 각 지역의 성 쌓는 공사와 관련하여 아뢰다.

병조에서 아뢰기를, ‘청컨대, 금년 안으로 충청ㆍ전라ㆍ경상 3도의 각년(各年)에 시작해 쌓는 성(城)의 마치지 못한 것을 금년 안으로 마쳐 쌓게 하옵시며, 그리고, 남해에 쌓는 성은 일찍이 선군(船軍)을 부리어 쌓게 하였사오니, 극심한 추위와 장맛비와 더위와 방어하기에 가장 긴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쌓게 하고, 또 해문(海門)의 요충(要衝)인 김해의 읍성(邑城)도 금년에 시작하여 쌓게 하옵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김해읍성 모습.
김해읍성 모습.

또한 김해읍성이 중요한 군사 요충지임을 알 수 있는 기록을 보면, ‘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8월 5일. 1434년) 내이포 등지에 사는 왜인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다.

임금이 말하기를, “허조(許稠, 1369~1439)가 아뢰기를, ‘내이포(乃而浦)’ 등처에 왜인이 많이 와서 사는데, 만호(萬戶) 남우량(南友良)이 부임하는 길에 그 수효를 기록하여 보내라고 청하였더니, 우량이 써서 보내기를, 갑진년 이후에 와서 사는 수가 남녀 합하여 360명가량이라”고 하였사오니, 이것으로서 보면 전에 온 것은 얼마인지 알 수 없사오며, 지금 비록 위엄을 두려워하여 투항하였사오나 마침내 믿을 수는 없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뜰에서 자고 가기를 애걸하는 자가 안방을 꾀한다고 하오니, 이제 우리나라가 융성하게 다스려지는 때를 당하여 왜적의 침노를 족히 염려할 것은 없사오나, 천지의 기운도 오히려 상하고 쇠함이 있고, 제왕(帝王)의 정치도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이 서로 바뀌니, 이제 우리 조정이 극히 다스려졌다 할지라도 천년 후에는 오늘과 같지 않을런지를 어찌 아오리까. 후환을 막고자 하면 마땅히 드러나기 전에 이를 도모하소서’ 하였으니, 내가 허조의 말을 옳다고 여기나, 그 처리할 적당한 방법을 알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가할까”하니, 황희 등이 의논하기를, “그들이 와서 살기를 허락한 것이 이미 오래였는데, 이제 이르러 거절하고 들이지 않으니 때가 늦었습니다. 또 각도에 나누어 두려면 저들이 반드시 싫어할 것이니, 진퇴(進退)가 어렵습니다. 아직 그대로 두되, 신 등이 다만 원하는 것은 금년에 먼저 김해 읍성을 쌓고 다음에 내이포 현성(縣城)을 쌓아서, 만일 왜적의 변이 있거든 백성들로 하여금 옮겨 들어와서 피난하게 하옵소서” 하니, 최윤덕이 아뢰기를, “현성은 우도(右道) 수군들을 뽑아 쌓게 함이 가합니다” 하였다. 또 의논하기를, “선대로부터 전하는 문서를 어느 곳에 간직할지 알지 못하겠다” 하니, 황희 등이 아뢰기를, “선원전(璿源殿)에 간직하여 뒤에 상고하는 증빙(證憑)이 되게 하옵소서” 하매, 모두 그대로 따랐다.

개항장인 내이포, 웅천과 창원 방어

내이포는 당시 진해시 웅천동(熊川洞)에 있었던 개항장(開港場).

제포(薺浦)라고도 한 이 지역은 군사적 요지로 웅천과 창원을 방어하고 마산포의 해상운송을 돕는 역할을 하였다. 1443년(세종25)에 계해조약으로 삼포(부산포ㆍ제포ㆍ염포)에 왜선(倭船)의 내왕 및 왜인의 체류를 허가하였다.

계해조약, 쓰시마 도주와 맺은 조약

계해조약(癸亥條約)은 1443년(세종25) 조정을 대표하여 변효문(卞孝文, 1396~?) 등이 쓰시마 섬에서 일본의 쓰시마 도주[對馬島主] 소 사다모리[宗貞盛]와 세견선(歲遣船) 등에 관하여 맺은 조약.

‘계해약조’라고도 한다. 1419년 쓰시마섬을 근거지로 하여 말썽을 부리던 왜인들을 정벌한 후, 한동안 조선ㆍ일본 사이의 왕래가 중단되었으나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다시 삼포(三浦)를 개항하여 무역과 근해에서의 어획을 허락하면서 후환을 염려하여 종전에 비하여 상당한 제한을 가하는 구체적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조건은 다음과 같다. ①세견선은 1년에 50척으로 한다. ②선원수는 대선(大船) 40명, 중선(中船) 30명, 소선(小船) 20명으로 정하고 이들에게는 식량을 지급한다. ③삼포에 머무르는 자의 날짜는 20일로 한하되, 상경한 자의 배를 지키는 간수인(看守人)은 50일로 정하고 이들에게도 식량을 지급한다. ④고초도(孤草島,거문도)에서 고기잡이하는 자는 지세포만호(知世浦萬戶)의 허락을 받은 뒤 고기를 잡고, 이어서 어세(漁稅)를 내야 한다. ⑤조선에서 왜인에게 주는 세사미두(歲賜米豆)는 쌀과 콩을 합하여 200섬으로 제한한다는 등이다.

세종은 왜인들의 성품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먼저 위세를 떨쳐 그들을 정벌한 다음, 다시 은정(恩情)을 베풀어 그들의 살 길을 열어 주었다.

왜관을 설치하여 60여 명이 거주하도록 하였으나 500여 호에 이르면서 내국인과 충돌이 잦아 왜인들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게 되자 1510년(중종 5) 왜인들이 쓰시마섬[對馬島]의 원병과 함께 삼포왜란을 일으켜 제포 첨사 김세조(金世釣)를 살해하고 제포와 웅천을 점령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토벌군을 보내 제포성을 복구하고 한동안 왜인의 거주를 허가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부근에 사화랑(莎火郞) 봉수가 있었고 김해ㆍ창원ㆍ안골포와 이어지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또한 제포 앞바다에는 가덕도가 있어 임진왜란 때 원균(元均)과 왜군이 격전을 벌인 곳이다. 1908년 창원부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창원군에서 진해시로 편입되었다. 현재는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에 있다. 세종대부터 일본인은 내이포를 중심으로 무역을 한다는 핑계로 많은 일본인이 불법 체류하였고 따라서 임진 침략 시 상륙 경로를 잘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김해 침투 작전이 수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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