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19:30 (금)
당쟁의 피로 물든 땅의 역사
당쟁의 피로 물든 땅의 역사
  • 이광수
  • 승인 2021.08.22 2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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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수 소설가
이광수 소설가

조선시대 사대사화(四大士禍)는 중고시절 국사시험문제로 자주 출제돼 다들 기를 쓰고 달달 외웠다. 사림파가 참혹하게 옥사를 당한 당파싸움으로 `무오갑자기묘을사 연산연산중종명종`식이다. 사화가 일어난 해의 육십갑자와 해당임금이다. 조선당쟁잔혹사로 불리는 사대사화는 반대파의 씨를 말리는 피의 권력 투쟁사였다. 동인서인 남인북인으로 갈라져 대결한 사색당쟁으로 무고한 중신들과 선비들은 삼족이 죽임을 당하는 멸문지화를 입었다. 삼족(三族)은 조족인 할아버지를 비롯한 백부와 숙부, 부족인 그 형제와 소생인 조카, 기족인 아들과 손자들을 말한다. 여자들은 노비신세로 전락했다. 반대파를 숙청하는 연좌제의 악형이었다.

성종 때 도승지를 지낸 임사홍은 임관 초창기 직언을 마다않는 관리로서 문장에도 능하고 총명했다. 성종실록에 의하면 흉조인 황사비가 내렸을 때 성종이 그 비가 내린 것이 자신의 탓인 양 신료들에게 물으며 스스로 답하자 각자 답을 내놓았다. 주로 사치와 술을 금하라는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왕실 비서실장인 임사홍은 신료들과는 다른 말을 임금에게 고해 어전회의는 난장판이 되었다. 이로 인에 사림파 신료들로부터 소인배(小人輩)로 낙인 찍혔다. 그러나 성종은 그의 재주와 능력이 아까워 적극 감싸고 변호했지만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장악한 사림파에 의해 탄핵되어 의주로 유배되었다. 이때 무오사화의 원흉인 유자광도 동래로 유배됐다. 그 뒤 성종은 삼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에게 권한 없는 한직을 주어 복권시켰다. 그리고 성종의 딸 휘숙옹주를 임사홍의 넷째 아들 숭재에게 시집보내 사돈관계를 맺었다. 성종 사후 휘숙옹주의 오빠인 연산군이 즉위하자 임사홍의 아들 승재는 자기여동생을 연산군에게 바치는 등 온갖 아첨을 떨었다.(연산군 일기) 이제 임사홍은 물 만난 고기처럼 권력을 쥐락펴락 하게 됐다. 연산군은 대간들이 집단사표를 던지는 강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임사홍을 종2품 가선대부 상호군으로 봉했다. 하지만 그의 차남 희재는 무오. 갑자사화에 연계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능지처참 되었다. 임사홍은 자식의 죽음을 딛고 권력을 장악한 비정한 아비가 되었으나, 자신을 유배 보내 실권시킨 사림파 신료들을 대역죄로 모함해 죽였다. 그리고 연산군의 채홍사(임금에게 여자를 뽑아 바치는 벼슬)가 되어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화무십일홍 권불십년`이라는 말처럼 하늘을 찌르던 간신 임사홍의 권력도 중종반정으로 단죄되었다. 그는 반군이 휘두른 몽둥이에 맞아 비참하게 죽었다. 그리고 죽은 그달 26일 반정세력은 그의 무덤까지 파헤쳐서 관을 부수고는 시신을 끄집어내어 목을 잘라 부관참시(剖棺斬屍)했다.(박종인. 땅의 역사)한편, 단종부터 성종까지 네 임금을 시중했던 환관(내시) 김처선은 간신 임사홍과는 달랐다. 연산군의 음란함이 극에 달하자 "네 분 임금을 섬겼지만 이처럼 문란한 군왕은 없었소이다"고 극간했다. 이에 격분한 연산군은 화살로 쏴 그를 넘어뜨리고 다리를 잘라 버린 후 일어나라고 명했다. 이 때 김처선은 "상감은 다리가 없어도 걷소이까"라며 힐난하자, 그의 혀를 자르고 배를 갈라버렸지만 숨이 끊어질 때까지 말을 그치지 않았다.(조신 소문쇄록) 연산군 사후 나라에서는 목숨 걸고 간언한 김처선의 충절지개를 기리는 정문을 세워 향사토록 했다. 반면 연산군의 채홍사로 아첨을 떨며 중신들을 죽인 간신 임사홍은 천추만대에 씻지 못할 욕된 이름을 후대에 남겼다.

조선 단종ㆍ세조ㆍ성종임금 때 5부자 6급제한 함안이씨 8세 대사성 미와 네 아들 (9세 대사헌 인형, 남원부사 의형, 목사 예형, 대사간 지형)은 폭군연산과 간신 임사홍에 의해 사림파 거두 점필제 김종직과 사돈지간이자 문인이라는 이유로 참변을 당했다.

성종임금은 5부자가 태어난 진주 가좌촌리 진동을 `가좌촌`이라 사촌명(賜村名)하여 월아산하에 반조정이라고 칭송했다. 4형제는 모두 세조ㆍ성종 때 문과 대과에 5급제(예형:양과급제)하여 명문거족의 반열에 올라 가문이 흥성할 대기를 맞았으나 갑자사화의 참화로 궤멸됐다. 5부자 6급제로 찬연히 빛나던 함안이씨 가문은 풍비박산 멸문지화를 입었다. 그러나 600년의 지난 세월은 한 맺힌 선조의 통한을 대하에 씻어 정화시키고, 모진 목숨을 이어온 후손들은 조상의 음덕을 기리며 오늘을 살아간다. 어찌 함안이씨 선조만 그런 화를 당했겠는가. 이조 5백년의 피비린내 나는 당파싸움은 결국 조선왕조 멸망으로 귀결됐다. 하지만 오욕의 지난 역사는 헌정 70년의 현대사까지 청산되지 않고 반목과 대립의 정쟁사로 얼룩졌다. 이제 당쟁의 피로 물든 치욕스런 땅의 역사는 결코 반복돼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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