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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국가’ 구야국 그리고 김해 ⑥
‘오래된 미래 국가’ 구야국 그리고 김해 ⑥
  • 허영호
  • 승인 2021.07.29 2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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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 김해문화원 부원장
허영호 김해문화원 부원장

화천은 중국의 전한(서한)을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8~23년)가 발행한 주화다. 전한의 평제를 폐위시키고 신(新)나라를 창건한 왕망은 급격한 개혁정책으로 불과 15년 만에 왕위에서 쫓겨난다. 왕망이 나라를 세울 당시 흉노족 김(金)씨 세력을 도움을 받았는데 이 세력은 신나라가 망하자 낙랑을 거쳐 신라와 김해 일대로 이주하게 된다. 신라 문무왕은 스스로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고 ‘대당 고(故) 김씨 부인 묘비’에도 <우리 조상 김일제는 흉노에서 왔다.>라고 적혀 있다. 화천은 이 왕망의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온 김일제의 후예들의 증표다. 이런 의미에서 <가락은 또 다른 흉노족의 나라>다.

흉노족은 중국 전국시대에 흥하여 약 300년 동안 중국 북방 초원지대를 지배한 유목민이다. 진시황은 흉노의 공격을 두려워 만리장성을 쌓았으며,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고사도 말이 살찌면 흉노의 침략이 잦아지니 경계하라는 데서 유래했다. 남북으로 갈라져 남흉노는 선비족과 결합하여 스스로 선비족이라 했으며 한반도까지 진출했다. 북흉노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멀리 헝가리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이 유럽에서 훈족(Huns)으로 불릴 때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날 정도로 유럽을 들쑤셨으며, 한때 잘 나갈 때는 동로마를 반쯤 조져놓고 교황이 중재를 하고서야 주먹질을 멈출 정도로 펀치가 셌다.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탄, 타지키스탄 등 중앙아시아 5개국도 단군(탕그리) 계열의 흉노족의 나라다.

다음으로 허황옥(許黃玉)이라는 여인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누를 黃에 구슬 玉이다. 黃은 중원(中原)의 땅 즉 중국이 자기 땅의 중심이라고 일컫는 곳의 색깔을 의미한다. 黃 이외의 모든 색깔은 주변부에 속했다. 천자문에 玉은 옥출곤강(玉出崑岡)으로 쓰인다. ‘옥은 곤강에서 나온다’는 뜻으로 즉 옥은 아무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선택된 특별한 곳에서 나온다는 의미다. 이는 황옥 자신이 좋은 가문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수로가 ‘철을 지닌 우두머리’라는 뜻이면 황옥은 ‘옥과 유리구슬 등을 교역한 집단의 상징’이다. 이 여인의 출생지는 이천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에게 많은 숙제를 안겨 주고 있고 한편, 그것은 많은 스토리를 제공하고 있다. 그가 인도서 아요디아 아유타에서 왔는지, 중국 사천성에서 왔는지, 태국의 아유티아에서 왔는지 아무도 모른다. 더러 일본 큐슈(九州) 동북방에 있던 가락국의 분국(分國)에서 왔다고도 한다. <가락국기>에는 그가 돌배를 타고 저 멀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돌배야 돌(파사석탑)을 싣고 와서 ‘돌배’라고 하지만 그 당시 항해술로 뱅골만을 지나 수마트라 해협을 거쳐 중국 광주(廣州)에 정박 후 가야 땅에 도착하기에는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사실로 고증이 더 필요하다.

그렇다고 중국 후한 시절 사천성의 허(許)족들이 정부 관리의 횡포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키고 실패한 후 탄압을 피해 남쪽으로 이민한 집단이라는 설도 여전히 후한 점수를 받기엔 2% 부족하다. <삼국지> 위서 진한조에는 ‘명낙랑인위아잔’(名樂浪人爲阿殘, 낙랑인은 본디 남은 사람) 구절이 보인다. 동방 사람은 자신을 아(阿)라고 하는데 아잔은 ‘낙랑인 이나 그 후예들’을 지칭하는 말로 허황옥은 선진문물을 가지고 온 아잔의 무리로 해석한 것이다.

당시 가야는 낙랑을 통해 철을 비롯한 문물들을 중국과 교역하고 있었는데 이에 비추어 황옥 일행을 교역과 상업을 전개했던 상인집단 혹은 낙랑계 이주집단으로 본 것이다. 돌배가 가락에 도착한 후 황옥 일행만 남겨두고 돌아간 것을 두고 이 배가 고대 통상적인 낙랑의 무역선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인도서 가락까지 이역만리 만경창파를 무릅쓰고 혼인을 목적으로 왔다면 뱃삯만 받고 선원들이 돌아가기에는 뭔가 섭섭하지 않은가. <삼국유사>에는 “뱃사공은 모두 15명이었는데 각각 쌀 10섬과 베 30필씩을 주어 보냈다.”라고 적혀 있다. 낙랑이 망하자 가락의 철 수출도 막혀 국운이 쇠퇴하기 시작한 점도 눈여겨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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