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고무신 ②
하얀 고무신 ②
  • 이은정
  • 승인 2021.07.26 22: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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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의 숲에서 더 성숙해질

수 있다면 고무신을 단단히

고쳐 신고 그 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이은정 수필가
이은정 수필가

시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할 때, 어머님이 즐겨 신으시던 남자용 하얀 고무신이 나왔다. 집안 살림이며 농사일이며 팽이처럼 돌아가던 바쁜 삶이 볼이 좁은 여자용 고무신으로는 감당이 안 되었으리라. 바닥에 붉고 동그란 왕자 표 도장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그 신발엔 어머님의 고단한 삶의 궤적이 묻어있는 것 같아 마음이 울컥했다. 생전에 며느리와 신발 문수가 같다고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을 떠올리며 조심스레 신어보니 20문 크기의 남자용 고무신이 내 발에 딱 맞았다.

그때부터 나는 매사를 슬기롭게 처리하시던 어머님의 지혜와 근면한 땀의 교훈을 받아 신듯이 하얀 고무신 애용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다시 새벽이다. 습관처럼 대문을 열고 고무신을 신고 텃밭을 둘러본 뒤 산책길에 나섰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삽상한 초여름 바람이 제법 서늘하여 옷깃을 세우고 천천히 걸었다.

집에서 들로 이어지는 내리막길을 십 분쯤 걷다 보면 작은 다리가 있고, 그 다리를 건너면 오랫동안 참외 농사를 짓던 우리 집 논이 나온다. 날마다 이 길을 걸으면 치열했던 삶의 현장 속의 오래된 내 모습이 떠오른다. 논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새참이며 점심 함지박을 이고 수없이 드나들었던 길, 어떤 날은 만삭의 무거운 몸을 이끌고 걸었고, 어떤 날은 몸이 아파서 서럽게 눈물을 흘리며 걸었던 길이다.

지금은 모두 추억이 된 사연들이지만 날마다 이 길을 지나며 그때를 떠올리는 것은 나태해지려는 나의 일상을 새롭게 각성시켜주는 일이기도 하다.

칠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서 벼들은 하루가 다르게 자라고 들판을 둘러싼 주위 산들의 녹색 빛깔이 더욱더 짙어졌다. 녹색은 생명의 색깔이다. 녹색을 보면 눈이 시원하고 마음도 상쾌해진다. 녹색의 빛깔이 점점 더 짙어질 때면 나를 비추는 햇빛도 더 따사로워지지 않을까? 칠월의 들판을 걸으며 이미 성장을 멈추고 퇴보의 길을 걷고 있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녹색의 숲이 손짓을 한다.

그 속에서 내가 조금 더 성숙해질 수 있다면 고무신을 단단히 고쳐 신고 푸른 숲속으로 뛰어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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