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20:16 (화)
`오래된 미래 국가` 구야국 그리고 김해 ⑤
`오래된 미래 국가` 구야국 그리고 김해 ⑤
  • 허영호
  • 승인 2021.07.22 22: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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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 김해문화원 부원장
허영호 김해문화원 부원장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본조사략에는 금관가야까지 넣어 (濫記) 창녕까지 기록했으니 잘못(誤)이다. 태조 천복(天福) 5년(940)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쳐 그 첫째를 금관(金官)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6가야(금관가야, 대가야, 소가야, 비화가야, 아라가야, 소가야)의 출현도 구지봉 탄강 6란의 설화에 맞춰 통일신라 이후에 윤색된 것으로 6가야설 역시 구라(?)에 가깝다는 뜻이다.

금관가야는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용어로 수로시대와의 어떤 인과성이나 역사성을 찾기가 어렵다. 더군다나 금관이라는 뜻 자체가 `한낱 쇠를 다루는 관서`의 뜻이라면 <우리 지역에서 이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자제>되어야 한다. 이를 3~12세기 이후 시대 별로 살펴보면 변진구야국, 구야한국 →임나가라→대가라, 남가라→금관국, 금관가야, 가락국, 남가야 등으로 변천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더불어 6가야설에 대해 가장 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구절을 보자. "생각컨데 6가야설은 여러 나라 가운데 주요한 나라가 여섯이 있었다는 전설에 따라 이것을 가야국의 고허(古墟)라고 전하는 여러 지방에 배당하여 본 것인데, 어떤 곳은 전설이 있어서 바로 배당하였으나 전설이 없는 곳들에는 그 배당이 잘못된 곳도 있는 것 같다." `가라강역고`(加羅疆域考)에 나오는 말이다. 배당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해석하자면 6가야설은 가야의 여러 소국 중에 힘깨나 쓰고 조잡하지만 작은 전설이라도 있는 소국들을 추려 6가야 설화를 덧붙였다는 의미로 수로의 탄강설화도 여기에 배당을 받아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사료에 따라 7가야 5가야 4가야 등도 보이며 옛 지명과 현재 지명이 일치하지 않는 곳도 더러 있다.

수로의 힘이 세어질수록 주변은 경계의 눈초리가 높았다. 서부해안의 조무래기 여덟 나라 포상팔국(蒲上八國)은 끊임없이 가락국을 괴롭혔고 경주 쪽의 사로국(斯盧國)은 진한 12부족을 통일하여 신라(新羅)로 이름 짓고 가야 땅마저 노리고 있었다. 한때 가야는 신라의 송사에 가서 판관 노릇을 할 만큼 국력이 강성하기도 했지만 단일대오 즉 <중앙집권적 권력체계>를 세우지 못하고 느슨한 연맹체제의 한계는 죽기 살기로 달려드는 `화랑`(花郞)의 기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400년 가야는 왜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다 신라의 요청으로 고구려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 군사에 오히려 박살이 나고 나라의 존망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를 남정(南征)이라 한다. 남정의 펀치를 맞고 시름시름 앓던 가락국은 결국 10대 구형왕을 마지막으로 왕조의 문을 닫게 된다. 남정을 전후로 가락시대를 전기가야(前期伽耶)라 하고 고령의 대가야가 가락의 유민을 받아들여 끗발을 날리던 시대를 후기가야(後期伽耶)라 한다.

신라는 가락국의 항복 → 낙동강 하류지방의 진출 → 가야지방 일대 통합 → 한강 하류 지방 확보 → 중국(수, 당)과 직접 교류 구축 → 삼국통일 원동력 확보로 이어진다. 가야의 들판은 기름져 평야를 이루고 들판 한가운데로 깊숙이 들어온 낙동강은 풍성한 해산물을 토해냈다. 바닷물은 현 김해시청 앞까지 찰랑거렸고, 시청에서 바라다보이는 논 한복판에 있는 전산(삼정동 소재)은 조그마한 섬처럼 보였을 것이다. 황옥의 배가 진해 주포(별포)가 아닌 전산에 닿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통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 수로왕이 궁궐에서 배를 보려면 적어도 가시거리에 섬이 위치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청 부근 일대는 지금도 지하수를 파면 짠물이 비친다.

봉황동에 고즈넉이 자리하고 있는 조개무지(貝塚패총)도 사연이 많다. 조개의 속살에 간직되어 있는 여러 사연 가운데 화천(貨泉)은 가장 가슴 아픈 역사를 담고 있다. 화천은 중국의 전한(서한)을 멸망시킨 왕망의 신나라(8~23년)가 발행한 주화다. 한의 평제를 폐위시키고 신(新)나라를 창건한 왕망은 급격한 개혁정책으로 불과 15년만에 왕위에서 쫓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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