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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국가` 구야국 그리고 김해 ④
`오래된 미래 국가` 구야국 그리고 김해 ④
  • 허영호
  • 승인 2021.07.15 22: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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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호 김해문화원 부원장
허영호 김해문화원 부원장

`삼국지`에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라고 되어 있어 간혹 진국과 곧 진한을 동일 시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말은 진국이 발전해 진한이 된 것이 아니라 진한이 진국의 법통을 이어받은 부족연맹이며, 진국(辰國)은 삼한의 모든 나라를 <통칭>한 것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韓)에 셋이 있으니 마한, 진한, 변한이 그것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으며 54국이고 총 10여만 호(戶)가 나라를 이루었다. 북쪽은 낙랑이며 남쪽은 왜와 접하고 있다. 진한(辰韓)은 진(秦)의 고역을 피하여 온 망명인으로 마한이 그 동쪽의 땅을 주어서 살게 하였다. 12국이며 사오만 호로 그 북쪽은 예맥을 접하고 있다. 7월 6일 변한(弁韓) 혹은 변진은 총 열두 나라로 칠만오천 정도의 백성이 있었다. <변진미리미동국-밀양>ㆍ<변진접도국-함안 칠원>ㆍ<변진고자미동국-고성>ㆍ<변진고순시국-진주>ㆍ<변진반로국-성주>ㆍ<변진악노국-합천>ㆍ<변진미오사마국-고령>ㆍ<변진감로국-김천>ㆍ<변진구야국-김해>ㆍ<변진주조마국-진동>ㆍ<변진안야국(마연국)- 함안>ㆍ<변진독로국- 부산.거제 동래> 등으로 비정된다. 그 남쪽은 역시 왜와 접하고 있다." 이 가운데 변진구야국이 오늘날 가락국이다. 왜인전에는 구사한국(狗邪韓國)으로 삼국사기에는 가라(加羅)로 기록되었는데 2만~2만 5000의 인구 규모를 이루었다.

고대 김해의 이름도 살펴보자. 첫째 가락국(駕洛國)이다. 이는 `가락국기`에 수로왕이 국호를 대가락(大駕洛)이라 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앞서 언급한 가라(加羅) 역시 가락국과 같이 쓰였다.

둘째 가야(伽耶)는 구야(狗耶)와 같이 쓰이면서 처음에는 구야국을 가리키는 이름이었으나 구야국의 세력이 커지면서 차츰 대가야를 포함한 가야 연맹 전체를 의미하는 이름으로 확대되었다. <가야는 시기에 따라 전체 명칭과 그 명칭이 가리키는 범위도 변화하였으나, 그 모두 `가야` 혹은 `가라`가 속한 일정한 <권역>을 가리키며, 가야 혹은 가라는 김해와 고령지역의 소국을 가리킨다. 그리고 김해와 고령지역은 가야의 본래 명칭을 가진 소국이자 가장 유력한 소국이었으며 여러 소국의 대표성을 띤 중심국이기도 했다. 결국, 유력한 소국의 명칭이 전체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이 바로 `가야`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친하는 가야는 단일 소국의 명칭이 아니라 복수의 소국들을 가리킨다. `가야연맹` `가라제국` 등의 보조단어가 붙는 것은 그 때문이다.>(가야인의 삶과 문학 P27 / 권주현 박사) 한 마디로 김해가 힘이 셀 때는 김해 주변의 나라를 통틀어 가야라 했고, 고령이 한 가닥 할 때는 고령 주변의 소국들을 뭉텅 그려 가야라고 했다는 의미다.

세 번째 일본서기에 자주 등장하는 임나(任那) 즉 임의 나라다. 광개토왕릉비에도 `임나가라`(任那加羅)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는데 허황옥이 처음 배를 닿은 주포(별포)가 임개로 불렸던 것에 비추어 임나를 임의 나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야는 일본으로 건너간 가야 출신의 제철집단이나 여러 이유로 고향을 떠난 재왜(在倭)가야인들이 불렀던 이름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권 박사는 "일본서기에 많이 등장하는 `임나`는 백제의 시각에서 바라본 것으로 주체적 가야사를 지향하는 입장에서는 타당하지 않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네 번째 금관국(金官國)이다. 이는 가락이 멸망할 무렵 신라가 쇠(金)를 다루는 관청(官)의 뜻으로 사용되었는데 훗날 김해 일대를 신라 오소경의 하나인 금관경(金官京) 지정하는 계기가 된다. 다섯째 금관가야(金官伽耶)다. `삼국유사` `기이`(奇異) 오가야조에 "오가야는 가락국기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주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이 되었고, 각 읍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본조사략에는 금관가야까지 넣어 (濫記) 창녕까지 기록했으니 잘못(誤)이다. 태조 천복(天福) 5년(940)에 오가야의 이름을 고쳐 그 첫째를 금관(金官)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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