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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은사<海恩寺>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해준 신께 감사하며
해은사<海恩寺>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해준 신께 감사하며
  • 도명 스님
  • 승인 2021.05.31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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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명 스님 산사정담(山寺情談)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지구의 역사를 보면 생명의 기원은 최초 바다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옛날부터 모든 생명의 어머니와 같은 바다는 인간의 탄생에서부터 생존까지 깊은 관계가 있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생명을 앗아가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였었다. 과거 무지의 시대에서는 바다 끝으로 가면 낭떠러지가 있어서 떨어져 죽는다고 믿는 때도 있었으나 인간의 도전정신과 항해술의 발달로 기원후 1세기에는 연근해를 통해 전 세계로 교류하였다고 지난 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는 말하였다.

서기 48년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 허황옥은 고향을 떠나 이역만리 머나먼 곳 가야로 시집올 때 한 척 배에 운명을 걸고 항해하였고 파사석탑을 호법선신(護法善神) 삼아 무사안전을 바다의 신께 간절히 빌었으리라.

<가락국기>에 보이듯 당차고 지혜로운 신부 허황옥은 구간이 마중을 와도 수로왕이 직접 오지 않았다 하여 따라나서지 않을 만큼 자존심이 셌으나, 가락국에 처음 도착하고서는 안전운항에 대한 감사와 새로운 땅의 토지신에 대한 예의로 보배산 산신에게 먼저 폐백 하였었다. 수로왕을 만나 이틀 밤의 신혼을 보배산 자락의 야외 장막궁전인 만전에서 보내고 본궐에 도착한 이후 어느 때에 허왕후는 자신이 온 바닷길이 한눈에 보이는 분성산 타고봉 아래에 바다의 신께 감사한다는 이름의 해은사(海恩寺)를 짓는다.

지금은 김해평야가 육지화되어 있지만 2000년 전의 옛날에는 평야 대부분이 바다였고 허왕후는 내해(內海)를 통해 본궐(本闕)로 왔으며 이후 어느 때에 해은사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해은사는 허왕후가 직접 지었는지 아니면 수로왕이 어여쁜 신부를 무사히 건너게 해준 바다의 신께 감사한 마음으로 대신 지어 줬는지는 알 수 없다.

허왕후 도래와 관련한 가야불교 연기사찰 해은사는 가야불교의 흔적과 설화들이 여럿 있고 도량에 들어서면 다른 사찰에서 볼 수 없는 `대왕전`(大王殿)이란 전각이 있는데 대왕이란 수로왕을 말하며 안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이 큼직하게 모셔져 있다.

영정의 모습은 조선 시대 민화풍으로 왕과 왕비의 품격이 보이기보다는 근엄한 어른과 그의 안주인 같은 모습인데 왕과 왕비의 권위는 없어 보이나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정감 있고 친숙해 보이기도 한다.

법당 뒤로 올라가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독특한 모양의 부처님 사리탑이 있는데 이 사리탑은 과거 김해 불교신도회 회장을 역임한 고 배석현 선생의 주도로 한일그룹의 고 김한수 회장이 후원하여 사리탑을 세웠다고 한다.

탑 안의 사리는 부처님 진신사리로 청나라 때 서예가이자 문인인 옹방강이 조선 불교의 부흥을 염원하며 친분이 있었던 추사 김정희에게 주었었고 추사는 전라도 해남 백화사의 주지 스님에게 이 진신사리를 모셔 드렸다고 연화사 7층 석탑 조성 비문에 전한다.

추사 김정희는 일가를 이룬 서예가이면서 정치가였고 이름난 금석문 학자였으며 또 뛰어난 재가의 불교 수행자로 본성을 깨달은 재야의 도인이기도 하였다.

백화사에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전해오고 있음을 알게 된 배석현 선생은 주지 응송 스님을 만나 사리탑 건립의 사정을 말씀드렸고 스님은 흔쾌히 사리를 봉안해 주실 것을 약속하였다고 한다. 이에 배 회장과 김해불교 신도회에서는 백화사에 석가탑 모양의 사리탑을 불사해주고 진신사리를 모셔왔으며 이러한 사리를 반으로 나누어서 해은사와 연화사에 봉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배석현 선생과 김한수 회장은 김해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며 사리탑을 세웠다고 하며 원래의 파사석탑을 재현하기 위해 부처님과 동족인 네팔의 석가족 석공들을 데려와서 작업을 하였다.

탑은 허왕후릉 옆에 있는 파사석탑의 원래 모양을 재현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상황으로 고증이 어려워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한다.

그래도 어려운 시절에 불심 하나로 가야불교의 재건과 수로왕과 장유화상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의 번영을 염원해오신 그분들께 존경의 마음을 드리고 싶다.

오랜 세월에 가려진 가야불교의 원형을 탐색하기 위해서는 인명과 지명, 그리고 절 이름 등을 잘 살펴보아야 하며 그것은 실재했던 어떤 사연이 계기가 되어 생겨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며칠 전 일본 올림픽 공식 홈페이지에 일본은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표시하여 또 물의를 빚고 있다. 나라 역사 지키기의 시작은 우리 스스로가 먼저 우리의 향토 역사 지키기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가야불교는 한국 불교의 자산이기에 앞서 가야문화라는 우리의 소중한 향토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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