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9:52 (금)
특허는 `탁`(度)이다
특허는 `탁`(度)이다
  • 허성원
  • 승인 2021.05.19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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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원 변리사 여 시 아 해(如是我解)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대표 변리사 허성원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대표 변리사 허성원

한 모임에서 옆자리의 한 중소기업 CEO가 말했다. 어렵게 제품을 개발하고 특허까지 여러 건 받아두었다. 동일한 기술의 모조품이 나왔기에, 경고장을 보내고 고소도 하고 소송도 걸었다. 그런데 몇 년간 매달렸지만 결국 모두 패소하고 말았다. 분명히 우리 제품과 구조와 개념이 동일한 침해품인데, 그걸 막아낼 수 없다면 특허는 받아서 뭐하며 특허제도는 왜 존재하냐며 분개한다. 그런 분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한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고자 하였다. 그는 먼저 자기 발을 재어 탁(度, 본)을 만들어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시장에 도착해서 보니 그 탁을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다. 신발을 손에 든 채로 "내가 탁 가져오는 걸 잊었어요"라고 말하고는, 집으로 돌아가서 탁을 가지고 다시 시장에 왔다. 그런데 시장은 이미 파해버려서 결국 신발을 사지 못했다. 누가 말했다. "어찌 당신의 발로 직접 신어보지 않았는가?" 그는 "탁은 믿어도, 발은 믿을 수 없어요"라고 답했다. 한비자(韓非子) 외저설좌상(外儲說左上) 편에 나오는 `정인매리`(鄭人買履, `정나라 사람이 신발을 사다`)라는 고사이다. 당시의 제자백가들이 실질과 현실을 무시하고 융통성 없이 교조적인 언어나 관념적인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져 있는 어리석음을 풍자한 글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 속의 정나라 사람처럼, 본질인 `발`은 믿지 않고 그 발을 잰 `탁`(度)만을 믿는 분야가, 지금의 우리 제도들 중에 있다.

그것은 바로 `특허`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특허는 `발명`을 독점하여 이용할 수 있는 권리이다. 권리 대상인 발명을 명확히 특정하기 위해, 출원 당시에 출원인은 발명 내용을 잘 정리한 명세서라는 문서를 제출한다. 명세서 중 특히 `특허청구의 범위`라는 부분은 발명의 가장 핵심 요지를 정하는 부분으로서, 그 기재 내용으로 특허권의 권리범위가 정해진다. 즉 `특허청구의 범위`의 기재는 위 고사에서 말하는 `탁`(度)인 셈이다.

특허등록에 의해 `특허청구의 범위`라는 `탁`(度)이 확정되고 나면, 이 `탁`(度)과 일치하는 기술은 특허침해로 인정되고, 그것과 어긋나면 특허침해를 벗어나게 된다.

이처럼 오로지 `탁`(度)만이 특허 침해 판단의 잣대가 되며, 발명자의 원래 발명 혹은 제품이 어떠했는가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발명은 복수의 기술요소 조합으로 이루어지므로 보기에 따라 다면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그래서 한 발명에 대해 사람마다 그 특징을 달리 정의할 여지가 많다. 정나라 사람의 `탁`은 발의 어느 부분을 잰 것일까? 물론 십중팔구 발의 길이일 것이다. 하지만 발이나 신발의 특징은 길이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발의 폭, 발바닥의 면적, 발의 높이 혹은 체적일 수도 있다. 혹은 발가락이나 발톱 등 일부의 모양이나 형상을 가리킬 수도 있다.

특허가능한 발명은 기존에 공지된 기술에 비해 새롭고 진보적인 기술이어야 한다. `새롭고 진보적인 기술`에 대해 부여된 특허의 권리 내용 즉 `탁`은 발명자 혹은 특허권자가 인식하고 있는 발명과의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허권자는 자신의 특허를 그저 `신발`에 관한 것이겠거니 막연히 생각하지만, 특허 내용은 신발의 `폭`이나 `높이`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부동산인 땅은 지적도에 의해 특정된 경계 내에서만 소유권이 인정된다. 특허도 앞에서 `탁`으로 비유한 `권리범위`라는 면적 혹은 공간 내에서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땅`과 비슷하다. 땅을 소유한 사람은 경계측량 등을 통해 자신의 권리가 미치는 범위를 잘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많은 특허권자는 자신의 권리가 어디까지 효력을 미치는지 잘 알지 못하고 있고, 대체로 잘 알려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권리자로서의 의무를 태만히 하는 것으로서, 권리 위에 잠자는 행위이다.

특허권자들이여, 시장에서 특허침해가 의심되면 `정나라 사람`을 생각하라. 침해품을 자신의 발명이나 제품과 비교하여 속단하지 말라. 집에 놓아둔 `탁`(특허)을 가지고 와서 그것으로 맞추어보라. 침해자도 마찬가지이다. 침해를 예방하거나 따져야 할 때는 내 제품을 상대방의 `탁`(특허)에 대비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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