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0:41 (목)
늙은 천리마와 흰 코끼리
늙은 천리마와 흰 코끼리
  • 허성원
  • 승인 2021.05.11 2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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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대표 변리사 허성원
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대표 변리사 허성원

"신령한 거북이 비록 오래 산다 한들 언젠가 죽을 때가 있고, 이무기 안개를 타고 오르나 끝내는 흙먼지가 되고 말지. 늙은 천리마 말구유에 엎드려 있어도 뜻은 천 리 밖에 있고, 열사(烈士)는 늙어가도 품은 큰 뜻은 흐려지지 않는다."

`귀수수`(龜雖壽)라는 시의 초반부이다. 치세의 간웅, 난세의 영웅인 삼국지의 조조(曹操)가 53세에 쓴 작품이다. 이 시에서 조조는 모든 생명이 늙음과 죽음이라는 숙명을 피할 수 없음을 한탄하면서, 천하를 호령하던 시절의 큰 뜻만은 여전하다고 읊고 있다. 하지만 세월 이기는 장사는 없다. 날랜 천리마도 강력한 권력자인 조조도 세월을 이기지 못하였다.

특허도 생로병사의 숙명에 구속된다. 연구개발의 성과인 발명은 출원 절차와 까다로운 심사를 거쳐 특허로서 탄생한다. 새롭고 진보적인 기술로 인정된 특허도 시간이 흐르면 기술 환경의 변화나 다른 파괴적 혁신에 의해 노화되어 시대에 뒤처진 낡은 기술이 된다. 특허는 내재된 다양한 하자로 인해 권리의 적절한 존속이나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질병에 걸린 것과 같다. 그리고 특허는 결국 소멸한다. 법정 수명인 존속기간의 만료에 의해 천수를 누리고 세상을 하직하여야 하지만, 법적 하자나 기술 노화를 이유로 무효 혹은 포기에 의해 조기에 소멸되기도 한다.

특허는 권리이며 재산이지만, 동시에 권리자에게 만만찮은 짐이기도 하다. 매년 연차료를 지불하여야만 권리로서 유지될 수 있으니, 그 비용은 보유 건수에 따라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 될 수 있다. 특히 말구유에 엎드린 천리마와 같이 늙거나 병든 특허는, 쓸모없는 무거운 과거의 추억만 품고 기업의 부담만 가중시킨다. 장수를 태우고 전장을 달리던 천리마가 늙었다고 하여 차마 버리지 못하듯이, 많은 특허권자들은 그들이 애써 개발했던 기술을 담은 특허를 쉽게 죽이지 못한다. 혹 언제 다시 쓰일지도 모르기에 꾸역꾸역 연차료만 지불하며 명맥을 유지하는 특허가 적지 않다.

이렇게 짐이 되어버린 특허는 마치 `흰 코끼리`와 같다. `흰 코끼리`는 태국, 버마 등 동남아의 불교 국가에서 매우 신성한 존재이다. 워낙 드물게 태어나기도 하지만, 석가모니의 모친인 마야부인이 흰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를 배태하였다 하여 신성하게 취급된다. 특히 태국에서는 나라의 수호신으로 대접받기도 한다. 그런 `흰 코끼리`를 고대 태국에서는 국왕이 신하에게 선물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선물은 총애하는 신하가 아닌 왕의 눈 밖에 난 신하에게 주어진다.

수호신인 흰 코끼리를 선물 받은 신하는 정성을 다해 길러야 한다. 코끼리는 수명이 사람보다 길고, 하루에 200㎏ 전후의 엄청난 양의 먹이를 먹어댄다. 이런 코끼리를 수명이 다할 때까지 건강히 기르려면 보통의 재력과 정성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 신하의 물질적 정신적 고통이 어느 정도일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선물이 곧 형벌인 셈이다. 이처럼 쓸모도 없으면서, 유지 노력이나 비용은 많이 들고,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수도 없는 그런 존재가 `흰 코끼리`이다. 회사나 가정에도 그런 존재들이 적잖이 있다. 아까운 공간을 크게 차지하거나 유지비용이 많이 들어도 거기에 깃든 사연이나 매몰 비용 때문에 처분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다.

특허의 `흰 코끼리`는 당장은 그 비용부담이 문제이지만, 더 큰 문제는 기업의 특허 정책을 왜곡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흰 코끼리 특허는 그 관리에 투입된 비용 대비 수익률 즉 투자자본수익률(ROI)을 악화시킨다. 그 지표에 기초하여 정책과 투자가 결정되기에, 도전적인 연구개발 노력이나 전략적 특허 활용 정책을 위축시키고, 그 결과 변화와 혁신의 기회나 타이밍을 어긋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기업에 있어서는 특허를 취득하여 쌓는 노력 못지않게, 보유한 특허를 적절히 버리는 지혜와 노력도 매우 중요하다.

`배움은 날마다 더하는 것이요, 도(道)는 날마다 비우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 _ 도덕경 제48장). 연구개발은 배움이니 그 성과인 특허를 부단히 채워 쌓아야 하고, 경영의 도는 이익을 늘리고 짐을 줄이는 데 있으니 쓸모를 다한 특허를 부단히 비워나가야 한다. 결국 특허정책의 성공은 채움과 비움의 균형과 조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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