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20:51 (토)
낙타의 배신
낙타의 배신
  • 허성원
  • 승인 2021.05.05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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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국제특허법률사무소 대표 변리사 허성원

`벤허`는 1959년에 개봉되어 아카데미상 11개 부문을 석권한 전설적인 영화이다.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전차 경기이다. 벤허(찰턴 헤스턴 분)와 메살라는 각기 흰색과 검은색의 말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목숨을 건 경주를 한다. 그 장면을 유심히 보면, 메살라는 시종 가혹하게 채찍질을 하지만, 벤허는 채찍을 전혀 쓰지 않는다. 게다가 벤허는 전날 밤에 마구간으로 가서 말들을 쓰다듬으며 정서를 교감하기도 한다. 물론 승리는 벤허의 것이었다.

공자가 가장 신임하였던 제자인 안연(顔淵)이 노(魯)나라 정공(定公)을 만났다. 노정공이 말했다. "선생께서는 동야필이 말을 잘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안연이 대답했다. "잘 부린다고 하니 그렇겠지요. 그렇지만 머잖아 말들을 그르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자랑인 동야필에 대해 험담을 들은 노정공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신하들에게 말했다. "군자도 억지를 부리며 남을 헐뜯는군!" 사흘이 지나자 사육사가 와서 아뢰기를, "동야필의 말이 잘못되었습니다. 양 참마는 벌어지고 양 복마(服馬)는 마구간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에 노정공이 즉시 안연을 불러오게 하여 그에게 말했다. "일전에 과인이 그대에게 물었을 때, `동야필이 말을 잘 몰기는 하겠지만, 비록 그렇더라도 머잖아 말을 그르치게 될 것`이라고 하였소. 내가 몰랐던 것을 그대는 어찌 알았소?" 안연이 대답했다. "저는 다스림의 이치로 그것을 알았습니다. 옛날 순임금은 백성을 다스리는 능력이 뛰어났고, 조보(造父)는 말을 다루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순임금은 백성을 곤궁하게 하지 않았고, 조보는 말의 힘을 다하게 하지 않았기에, 순임금은 백성을 잃지 않았고, 조보는 말을 그르치지 않았습니다. 지금 동야필의 말다루기는, 수레를 얹어 고삐를 잡고 재갈을 물려서 몸을 곧게 하도록 하며, 걷고 뛰고 질주하는 것이 조정에서 예를 다하듯 합니다. 험한 곳을 지나 먼 곳까지 이르러 말의 힘이 다하였는데도, 오히려 말에게 재촉하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이로써 알 수 있었습니다."

노정공이 "좋은 말씀이오, 말씀을 좀 더 들을 수 있겠소?"라고 청하니, 안연이 대답했다. "신이 듣기로 새가 궁하면 부리로 쪼고(조궁즉탁鳥窮則啄), 짐승이 궁하면 할퀴고(수궁증확獸窮則攫), 사람이 궁하면 거짓말을 합니다(인궁즉사人窮則詐).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랫사람들을 궁하게 하면서도 위태롭지 않은 자는 아직 없었습니다." 순자(荀子) 애공(哀公) 편에 나오는 고사로서, 불궁기마(不窮其馬, `말을 궁하게 하지 말라`) 혹은 궁하필위(窮下必危, `아랫사람을 궁하게 하면 반드시 위태로워진다`)라는 성어가 여기에서 나왔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체력이나 정신이 궁(窮)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 본연의 역할을 다할 수 없다. 결국은 관계된 사람이나 조직에 해를 끼치거나 위태롭게 할 위험이 크다.

특히 의욕이 강하고 열정적이던 사람이 갑자기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며 무기력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현상을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이라 한다. 번아웃은 말 그대로 소진 혹은 탈진 상태로서, 극도로 궁(窮)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번아웃 증후군의 다른 표현으로서 `낙타의 배신`이라는 말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이런 대화가 나온다. "낙타는 사람을 배신하는 짐승이라서, 수 천 리를 걷고도 지친 내색을 않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꺾고 숨을 놓아버리지." 낙타가 힘든 징후를 전혀 보이지 않다가 사막 한가운데에서 무책임하게(?) 쓰러진 상황을 생각해보라. 죽음이 안타깝기는 하겠지만,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사막 한가운데에서 벌어진 낭패스러운 상황과, 그 상황을 만든 낙타에 대한 배신감일 것이다. 추격견도 그렇다고 한다. 추격견은 그냥 두면 쓰러져 숨이 멎을 때까지 달린다. 그래서 주인이 상태를 엄밀히 관찰하며 추격 속도와 주행 시간을 통제하여야만 한다.

`낙타의 배신`이 치명적인 것은 동물이든 아랫사람이든 그들이 충성스럽고 열정적이며, 특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충성과 열정의 화신인 그들은 자신의 번아웃을 예측하지 못한다. 그들을 살피고 관리하여야 할 책임은 그들을 다루는 리더에게 있다. 즉 `낙타의 배신`은 리더의 직무유기에 기인한다.

결국 `낙타의 배신`은 `리더의 배신`이며, 그에 대한 응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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