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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사 중창기`의 기록과 대청동사지
`장유사 중창기`의 기록과 대청동사지
  • 도명스님
  • 승인 2021.04.05 22: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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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우리나라는 산이 많은 나라이며 예부터 선조들은 산에서 병을 낫게 하는 약초도 캐고 추운 겨울을 지낼 땔 나무도 하였다. 또 밤나무와 잣나무 등 유실수도 심고 비탈에는 밭을 일구어 생계를 의지하였다. 그뿐 아니라 인물을 논할 때면 대개 `무슨 산 정기를 타고났다`는 얘기가 빠지지 않으며 속담에도 `논두렁 정기라도 타고나야 무엇이라도 한다`는 등의 보이지 않는 후광으로서 산의 중요성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산은 우리의 삶과 떼 놓을 수 없는 고맙고도 신령스러운 존재로 옛 선조들은 생각하였고 산마다 거기에 맞는 의미 있는 이름들을 부여하였다.

경남도에는 김해와 창원을 경계로 하는 산이 있으며 이름을 불모산(佛母山) 또는 장유산(長遊山)이라고 한다. 불모란 `부처의 어머니`란 뜻이며 이 산의 내력에 대해서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하나가 가락국 일곱 왕자의 어머니인 허왕후를 지칭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칠 왕자를 출가하게 하여 득도, 성불로 이끈 스승 장유화상을 숭상하여 불모라고 불렸다는 설이 있는데 후자의 설이 더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것이 불모산을 장유산이라고도 하기 때문이다. 장유화상에 대한 최초 기록을 학계에서는 1708년의 <김해 명월사 사적비>라고 말하나 실은 그보다 160여 년 앞선 기록이 1544년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이 쓴 <장유사 중창기>이다. 중창기는 당시 주지인 천옥 스님이 당대의 대학자 주세붕을 찾아가 중창기 기문을 부탁하였고 주세붕이 승낙하여 찬하였다.

산승 천옥이 가락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빈도가 가락의 장유사를 다시 짓는데 병신년에 시작하여 내년 정유년에 마칩니다. 기둥이 60여 개 되는 건물에 불전은 순금과 주단으로 장식하여 남쪽 지방에서는 최고로 아름답습니다. 또 말하기를 처음 절을 지은 이는 신라 애장왕입니다. 수로왕이 두 번 확장한 이후 여덟 번째이며 여덟 번째 화주자가 소승입니다. 그 처음은 월지국 신승 장유대사가 화주 하였고 그 나머지 이름은 알 수 없습니다." `중창기`에서는 장유사 창건을 신라 애장왕대(800~809)로 보고 있다. 한편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가락국기>에서는 고려 광종대(949~975)에 장유사를 지었다 하고 있다. 두 기록이 다른 것은 일연 스님과 주세붕이 장유사에 대해 전해오는 다른 기록들을 각각 참고했음을 암시해준다. 그리고 풍수에 밝은 수로왕이 최초로 조그만 수행터를 잡고 월지국 출신 장유화상이 처음 화주하였으며, 신라 애장왕대에 그 터 위에 제대로 격을 갖춘 큰 사찰을 창건하였고 조선 시대까지 여덟 번째 중창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수로왕과 장유화상이 역할을 바꾸어 수로왕이 터를 정하고 장유화상이 화주 했다는 것으로 수로왕의 풍수에 대한 안목은 신답평에 도읍 정할 때도 나타났고 장유화상은 상인 집단 출신이므로 시주금을 쉽게 모금했을 것이다. 또 장유화상을 월지국의 신비스러운 스님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월지국은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존립했었고 중앙아시아와 인도에 있었으며 장유화상의 생존년대와 일치하는 시기다.

며칠 전 `불교 문화재 연구소`가 주관한 장유사 아래 대청동사지(寺址) 발굴 학술 자문회의에 가서 현장 설명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김해시가 가야문화의 원형을 탐색하는 일환으로 전문기관에 의뢰하여 발굴하였고 그 결과 통일 신라, 고려, 조선 시대까지의 축대와 건물지, 도자기와 기와 등이 발견되었다.

오랜 세월 속에 많은 소실이 있었지만 쌍계(雙溪)계곡위의 2m 높이. 40m 길이의 축대는 창건 당시 사찰의 격이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다. <장유사 중창기>에서 60개의 기둥이 있었다는 기록과 현재 발굴된 터의 규모와 건물지, 그리고 통일 신라 시대의 유물과 장유사의 애장왕대 창건 기록은 문헌 기록과 유물이 서로 부합함을 보여준다. 가야문화 발굴을 위한 김해시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가야문화의 정체성의 한 부분인 가야불교의 흔적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어 옛 선인들의 많지 않은 기록들도 다시 소중히 챙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사(太史)라는 역사에 관계된 소임을 역임할 정도로 역사적 안목이 있었던 주세붕이 장유화상을 역사 속에 실재한 인물로 보고 있다는 점과 대청동 사지의 발굴 유적이 옛 기록과도 일치함은 가야역사 바로 세우기의 진일보한 모습이다. 그리고 유물은 발굴만큼이나 해석도 중요하기에 학계의 안목 있는 해석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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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신자 2021-04-06 20:51:54
아주 훌륭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