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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 내원사 → ‘덕산사’로 이름 되찾고 봄 햇살에 고즈넉이 빛나다
천년 고찰 내원사 → ‘덕산사’로 이름 되찾고 봄 햇살에 고즈넉이 빛나다
  • 김영신 기자
  • 승인 2021.04.05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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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여년 전에 창건된 산청 덕산사 전경.
1300여년 전에 창건된 산청 덕산사 전경.

신라 원효대사 657년 창건

소실 후 재창건때 ‘내원사’ 변경

작년 10월 시굴조사 자료 발견

조계사 3월 이름 변경 승인

세월 풍파에 표정 읽기 힘든 국보 비로자나불좌상

지권인(智拳印)만이 중생 아꼈던 인자함 느끼게 해

지는 햇살에 더욱 붉게 빛나는 보물 삼층석탑 우뚝

장당계곡 벗삼아 1300년 역사 간직한 산청 덕산사

아침저녁으로 아직 쌀쌀한 기운이 돌지만 어느덧 한낮 기온이 20도를 넘기며 조금만 움직여도 등허리에 땀방울이 맺힌다.

나들이 하기에 한식과 청명 즈음만큼 좋은 시기가 또 있을까. 시야를 간지럽히는 초록빛 향연을 가슴 속에 담고 싶은 봄이 어느새 성큼 다가왔다.

민족의 영산, 어머니의 산이라 불리는 지리산. 그 중에서도 ‘천왕봉의 고장’ 산청으로 차를 몰았다. ‘목화와 선비의 고장’ 단성면을 지나니 남명 조식 선생 유적지가 있는 시천면에 다다른다.

남명 선생 제자들이 선생 뜻을 잇고자 지은 덕천서원을 지나 삼장면 대포리 방향으로 핸들을 돌리면 덕산사(내원사)로 오르는 길목인 장당계곡을 만날 수 있다.
 

산청 덕산사 대웅전.
산청 덕산사 대웅전.

1300여년 전 이름 되찾은 천년고찰 덕산사

장당계곡을 따라 조금만 더 올라가면 좌측 내원골과 맞닿는 지점에 덕산사가 자리하고 있다.

덕산사 첫인상은 ‘소박함’이었다. 키 높은 일주문도 없었고 대웅전을 비롯해 주변을 둘러싼 건물들도 다른 유명 사찰에 비하면 자그마하다.

그러나 이 소박한 고즈넉함 속에 담긴 오랜 역사를 알고나면 결코 작아 보이지 않는다.

덕산사는 지난 60여년 간 ‘내원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 그러다 최근 1300여년 전 ‘덕산사’라는 이름으로 처음 세워진 것을 확인할 실증자료 발견 덕에 본래 명칭을 되찾았다.

덕산사를 설명하는 안내문에는 신라 무열왕 4년(657)년에 원효대사가 처음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동방의 대보살로 불렸던 무염국사(801~888)가 상주하며 수 많은 수행자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래된 많은 사찰들이 그러하듯 1000여년이 지난 광해군 1년(1609)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로 절터만 남기고 전소됐다고 한다. 이후 1959년 원경스님이 절을 다시 세우고 내원사로 이름을 바꿨다고 전해진다.

그동안 문헌 상 기록 외에 기존 내원사가 덕산사 자리에 세워진 것을 실증하는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내원사는 본명을 되찾지 못한 처지였다.

지난 2020년 10월 대웅전 위치 고증을 위한 시굴조사에서 덕산사 사찰명이 새겨진 기와가 발굴돼 비로소 내원사가 덕산사의 사지(寺址)에 지어진 것을 확인했다.

산청군과 내원사는 이러한 자료를 바탕으로 명칭 되찾기를 진행했다. 지난 3월 중순 대한불교 조계종은 내원사 사찰명을 덕산사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했다. 이후 군은 지난달 26일자로 전통사찰 변경등록을 완료했다.

마냥 역사 속 인물로만 알고 있던 원효대사가 지은 절이라니 새삼 내원사 역사와 기원이 크게 다가온다.

내원사 기원인 ‘덕산사’는 산청군 시천ㆍ삼장면에서는 아주 낯익은 이름이다. 옛 부터 삼장면과 인근 시천면 지역민들은 자신들이 자리잡은 터를 ‘덕산’이라고 부른다.

시천면 초입의 남명 선생 유적지 인근을 ‘입덕문’이라고 부르는데 이 곳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통칭해 ‘덕산’이다.

이 곳 지역민들은 초중고교 이름을 ‘덕산’으로 지었고 강변에 조성된 시장 이름도 덕산시장으로 부른다. 하물며 농협 하나로마트 이름도 덕산지점이다.

이처럼 지역 곳곳에 붙여진 이름의 기원이 되는 덕산사는 작고 소박하지만 여느 사찰보다 정감있고 가까운 느낌이다.

오후 햇살 붉게 빛나는 내원사 삼층석탑

사찰을 한바퀴 둘러보다 보면 자연스레 오후 햇살을 받아 붉은 빛을 띠는 석탑에 눈길이 간다. 보물 제1113호 ‘산청 내원사 삼층석탑’이다.

신라 무열왕 때인 657년에 처음 세워졌다가 1950년대에 도굴꾼에 의해 파괴됐다. 그것을 지난 1961년 내원사에서 복원했다.

석탑이 붉은 빛을 띠는 이유는 철분이 많이 함유된 돌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지나온 흔적을 보는 듯 해 살짝 안쓰럽기도 하다.

비록 석탑 외관은 세월에 쓸려 거칠어지고 군데군데 부서지기도 했지만 역사적 가치는 상당하다.

전체적인 석탑 형상은 늦은 통일신라시기 것 임을 짐작하게 한다. 하지만 여러 장의 돌을 짜 맞춘 기단은 이른 시기의 전통을 잇는 것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변화를 확인 할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국보 제233-2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국보 제233-2호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국보 지정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작은 건물 6채에 불과한 내원사지만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 외에도 최근 국보로 지정된 ‘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불상이 있는 비로전으로 들어서자 세월의 풍파에 깎여 표정을 알아보기 힘든 돌불상이 눈에 들어온다. 워낙 오래된 탓일까,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눈코입 표현이나 옷깃, 손모양 등을 알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불상 옆으로 돌아서니 정면에서 볼 때는 몰랐던 특이점이 눈에 띈다. 마치 방석을 깔고 앉은 듯 어색한 가부좌와 몸의 비례와 맞지 않는 너무 얇은 등이 바로 그것이다.

찬찬히 살펴보니 불상 아래 좌대와 불상의 등 뒤를 받치고 있었을 광배가 서로 떨어져 깨진 듯 보였다. 목 부분도 깨져 시멘트로 이어 붙여 놓은 자국도 보인다.

단순히 오랜 세월 탓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많이 부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불상 아래 좌대 부분 연꽃잎 모양이 비교적 상세하게 남아있지만 불상 훼손 정도가 심해 무척 안타깝다.

비로자나불좌상은 지난 1990년 보물 제1021호로 지정됐다가 2016년 국보 제233-1호로 승격됐다. 이 불상은 곧게 편 왼손 집게 손가락을 오른손 안에 넣는 지권인을 하고 있는 탓에 비로자나불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특히,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로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불상이라고 하니 그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유물이다.

산청 덕산사(내원사) 안내문.
산청 덕산사(내원사) 안내문.

아무래도 상처투성이인 불상 모습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남명 선생 유적지에 근무하는 산청군문화관광해설사에게 이유를 물었다.

이 불상은 원래 덕산사(내원사)에 있었던 불상이 아니다고 한다. 인근 석남리에 커다란 돌바위가 있었는데 이 곳 절터인 석남사에 남아있던 불상이라고 한다.

이어진 이야기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1945~1947년께 이 지역에 살던 한 형제가 이 불상을 발견하고 집으로 옮기려하다 무게 탓에 여의치가 않자 무게를 줄이려고 불상을 좌대와 광배에서 떼어냈다는 것.

무지와 인간 욕심이 만들어낸 참극이지만 그럼에도 불상의 지권인 만은 선명한 모습으로 남아 있으니 비로자나불이 그 형제를 꾸짖지 않고 자비롭게 보듬어 주는 듯 하다. 비록 불상의 얼굴 표정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불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를 담은 지권인을 보니 중생을 아끼고 사랑한 부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훈훈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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