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07:51 (목)
허왕후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허왕후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 도명스님
  • 승인 2021.03.15 2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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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삼국유사 권3 탑상편 금관성 파사석탑조

金官城 婆娑石塔條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미지의 먼 길을 갈 때는 누구나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목숨이 달린 위험한 길을 떠날 때는 안전한 운행을 위해 자기가 믿는 신앙의 소형 호신상을 모셔 가거나 부적을 몸에 지니기도 하며 또는 호신 주문을 염송하기도 한다. 김해에 있는 허왕후릉의 파사석탑은 그녀가 이팔청춘 16세의 나이로 목숨 걸고 이 땅에 올 때 2만 5000여 리의 바닷길을 지켜준 수호신이었다고 `삼국유사 파사석탑조`에서는 말한다.

<"금관성의 호계사 파사석탑은 옛날 이 고을이 금관국일 때 세조 수로왕의 비 허 황후 이름은 황옥인데 동한의 건무 24년 무신년(서기, 48)에 서역 아유타국으로부터 올 때 싣고 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양친의 명령을 받들어 배를 띄워 동쪽 바다로 향하다가 험한 파신의 성냄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 부왕에게 아뢰었더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도록 명하였다. 이에 편리하게 건너게 되어 ~중략~ 그리하여 당시 해동의 끄트머리에는 절을 세우고 불법(佛法)을 받들었으나 아마도 상교(像敎)가 들어오지 않아 이 지방 사람들은 믿지를 않았다. 그러므로 본기(금관국본기)에도(이 지방사람들이) 절을 세웠다는 글귀가 없다.">

가락국기를 처음 지은 때가 고려 문종조 대강(大康, 서기 1074~1082)년간이었고 그 200여 년 후에 삼국유사를 쓸 당시 파사석탑은 호계사라는 절에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탑의 출처는 <서역 아유타국>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있는데 고대인들이 인식했던 서역은 인도, 중앙아시아, 아랍 등 광활한 서아시아 일대였고 아유타국이 현재 인도의 아요디아라는 점까지 고려하면 탑이 온 곳은 인도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탑이 오기까지의 과정도 육하원칙에 의해 자세하게 말하고 있고 탑을 싣고 온 목적이 파신(破神)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기 위한 액막이의 용도라고 하는데 지금도 인도 아요디아에서는 파사석을 갈아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한 액막이용으로 돌가루를 얼굴에 바르고 있다. 일설에 파사석탑의 현재 모양이 둥그스름한 것은 본래는 사각형이었으나 어부나 이 지방 사람들이 액막이 벽사의 목적으로 조금씩 떼가다 보니 지금의 모습으로 변했다고 한다. 또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그 당시 해동의 끄트머리인 가락국에는 불교가 들어와서 절을 짓고 불법을 받들었으나 아마도 상교(像敎-상법시대의 불교, 기원후, 6C~16C)가 아직 오지 않아서 이 지방 토착민들은 믿지 못했고 토착민들이 절을 세웠다는 기록도 없다고 하고 있다. 붓다는 기원전 6C에 탄생했는데 붓다의 사후인 기원전 5C부터 기원후 5C까지 천년까지를 정법(正法)시대라 하고 수행을 위주로 하는 시기이며, 붓다 사후 1000년 후인 기원후 6C에서 16C까지 천년을 상법(像法)시대라 하는데 불상 건립 등의 외형과 교학을 위주로 하는 시기를 말한다.

즉 가락국 초기 기원후 48년 허왕후를 비롯한 도래인들이 올 때 탑을 가져오고 절도 짓고 불교도 받들었으나 시기적으로 아직 상교가 오기하기 전의 정법시대라서 이 지방 토속인들은 믿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가야 시대 초기의 이 지방 토속인들은 이미 자기네가 신봉하는 토속 신앙이 있었고 도래인들이 들여온 불교는 생소해 믿지 못했기에 그래서 이 지방 토속인들이 세운 절은 없었다는 말이며 그것은 아마도 상법시대 이전인 정법시대라서 그러해 보인다고 일연 스님도 `아마도`라며 추측하고 있다.

현재 가야불교의 옛 기록과 부합하는 유일하다시피한 유물인 이 파사석탑의 진위 여부에 대해 지금껏 논란이 되고 있는데 부정적인 주장의 하나는 기원 전후 파사석탑과 유사한 탑이 있으면 인정하겠으나 유사한 탑이 없으면 인정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그러나 파사석탑은 불국사의 다보탑처럼 그 당시에도 유일했던 탑일 가능성과 아니면 몇 개 없는 소수의 탑이었는데 오랜 세월 속에 나머지 탑은 사라지고 이 탑만 남았을 가능성, 또 실재하지만 땅속에 묻혀서 아직 발굴되지 못했다는 가능성은 어찌할는지.

우리는 수많은 난관 속에서도 기적처럼 남아 전승된 우리 민족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

이 천 년 전에 허왕후를 이 땅으로 안전하게 인도한 허왕후릉 옆의 볼품 없어 보이는 저 탑이 그녀가 돌아가신 이 천년 후 지금까지도 호위 무사가 되어 그녀를 지키며 버티고 있는 모습을 보면 숙연한 마음 까지 들게 된다. "아~붉은 파사탑이여! 님 향한 일편단심 변할 줄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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