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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각국존비명`에서 본 일연 스님의 본래 면목
`보각국존비명`에서 본 일연 스님의 본래 면목
  • 도명스님
  • 승인 2021.02.15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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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여여정사 주지ㆍ가야불교연구소장 도명 스님

삼국유사라는 역사 문화서를 쓴 저자는 과거 역사 기록의 주류였던 관료나 유학자가 아닌 일연(一然)이라는 스님이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 전문가가 있어서 전문 서적은 대개 전문가가 쓰는 게 보통이지만 고대에서는 그 경계가 모호하여 문, 사, 철(文史哲)은 지식인이라면 으레 함께 하던 학문이었고 일연 스님도 문, 사, 철에 통달했던 분이었다.

그리고 학문이든 다른 분야든 한가지 전문가가 되는 것은 좋은 것이나 다만 한 가지 부분에만 천착하여 전체를 놓쳐 버리면 소위 `전문가 바보`가 되어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도 있게 된다.

특히 시간적 흐름과 공간적 관계성 속에서 만들어지는 일들을 다루는 역사라는 분야는 더욱더 전체를 보는 폭넓은 시각과 다양한 입장에 대한 깊은 이해가 필요한 학문이다.

이처럼 저자가 치우치지 않는 균형감 있는 시각과 폭넓은 지식을 갖추었을 때 역사속의 명저가 탄생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저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책의 저자가 어떤 역사 인식과 식견을 갖추었는지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은 과연 어떤 분인가 대략 하여 알아보자.

일연 스님의 일생이 기록된 보각국존비명(普覺國尊碑銘)을 보면 일연 스님은 고려 희종 2년인 1206년 오늘날 경북 경산에서 태어났는데 경산은 원효, 설총, 일연이 태어났다 하여 삼성(三聖)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본명은 전견명(全見明) 이고 자는 회연(晦然) 또는 일연(一然) 이다.

과거 일연 스님의 속성이 경주 김씨로 알려졌으나 최근 비문의 글씨 판독 결과와 학술발표에 따르면 `온전 전씨`로 판명되었다.

스님은 어린 나이인 9세에 전라도 광주 무량사로 출가했고 14세에 설악산 진전사 대웅 장로에게 구족계를 받아 스님이 되었다.

22세에 승과 상상과(上上科)에 수석 합격 후 참선 수행에 몰두하여 31세에 무주암에서 깨달음을 얻었고 그 후에도 참선을 지속하며 보임(保任) 수행을 하였다.

44세에 남해 정림사 주지 소임을 맡았으며 이후 54세에 대선사 품계를 품수 받았다.

그 후 개성 선월사, 포항 오어사, 현풍 인홍사, 용천사 등의 사찰에 머물면서 수행과 불사를 함께 겸하였고 63세 시에는 조정에서 선, 교 양종의 덕이 높은 100명의 스님을 청해 대장경 낙성회를 할 때에 스님을 법회를 주관하는 법주(法主)로 모셨다.

72세에 청도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젊은 시절부터 모은 사료를 바탕으로 삼국유사 집필을 시작했으나 간행은 열반한 해 또는 열반 직후 제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78세에 충렬왕으로부터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徑沖照)라는 호를 하사받았으며 이후 군위 인각사로 내려와 두 번에 걸쳐 선문(禪門)의 수장이 되어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주관하였고 불교계의 실질적인 가장 큰 어른이 되었다.

84세인 1289년에 인천보감(人天寶鑑)의 간행을 명했으며 충렬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다음 날 아침 제자들과 문답을 나눈 후 방으로 가서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이상 간략히 일연 스님의 생애를 살펴보았는데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동진출가(동자승)하여 30대 초반의 비교적 이른 나이에 진리를 깨달아 선(禪)과 교(敎)를 모두 통달하고 이(理)와 사(事)에 원융무애(圓融無碍)한 수행자의 완벽한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

선사이면서 대학자의 능력까지 겸하여 선어록 2권과 선문염송사원 30권을 비롯하여 100여 권의 저술을 남겼으나 안타깝게도 현재 대부분의 저술은 전하지 않고 있다.

지위가 보장된 고승이었음에도 한곳에 주석하지 않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찰을 옮겨 다니면서 수행하였고 어머니가 97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효를 다해 봉양하였다.

비문에서는 `스님께서 참선하는 여가에 대장경을 꼼꼼하게 읽고 여러 대가의 주석서를 연구했으며 유가와 도가뿐 아니라 제자백가까지 두루 꿰뚫었다`라고 하니 스님의 사상적 기반이 얼마나 탄탄하고 넓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는 우리 문화의 보고인 삼국유사를 쓴 일연 스님의 학문적 내공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러고 반전은 일연 스님의 캐릭터가 세상에 흔히 알려진 학승(學僧)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은 태산 같은 모습으로 앉아서 무쇠로 된 소의 등짝에 주둥이를 꽂겠다는 기상으로 참선하던 대선사(大禪師)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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