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09:06 (금)
번호표 이야기
번호표 이야기
  • 하태화 수필가 / 사회복지사
  • 승인 2021.01.19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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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화 수필가 / 사회복지사
하태화 수필가 / 사회복지사

은행, 병원, 관공서는 물론 가전제품 회사의 서비스 센터에 이르기까지 순서를 기다리기 위한 대기 번호표가 일반화되어있다. 업무를 보려면 출입문을 들어서자마자 대기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한다. 창구가 비게 되면 `딩동`하는 소리와 함께 전광판에 번호가 나오면서 `00번 고객님 0번 창구로 오십시오`라는 멘트가 나온다. 어떤 곳에서는 그냥 `딩동` 소리만 나오는 곳도 있다. 소리가 나면 조건 반사로 창구 쪽을 쳐다보게 된다.

일부 유명 커피점이나 페스트푸드점에서는 진동벨 대신 종업원이 `00번 고객님, 00 나왔습니다`를 외친다. 이 경우에는 귀를 쫑긋 세우고 있어야 한다. 우리는 번호를 부르는 것이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279번 고객님, 음식 나왔습니다` 언젠가 여행 중에 혼자 들른 고속도로 휴게소 식당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다. 항상 그랬듯이 번호표를 주고 음식을 받았다. `279번?` 사람에게 이렇게 번호를 붙여야 하나? 고객의 인격을 생각한다면 `279번 고객님`보다는 한 음절만 더 추가해서 `279번째 고객님`이라고 하면 어떨까.

번호가 표시되는 은행이나, 유명 커피점이나, 이 휴게소 식당에서도 말이다. 편리를 위해 번호를 매겨야 한다면 방문한 순서대로 사람에게 번호를 매기는 것보다는 방문한 순서 그 자체를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279번 고객님`과 `279번째 고객님`은 의미가 매우 다르다. 나는 번호가 279번인 사람이 아니고, 279번째로 방문한 사람일 뿐이다.

우리나라에서 1968년에 시작, 사회생활 어디라도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는 주민등록번호. 사실, 이 주민등록번호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별 유쾌하지 않다. 생년월일과 태어난 지역이 표시된 개인식별번호로서 마치 공장에서 생산된 공산품 시리얼 넘버와 같다. 생산품의 시리얼 넘버만 보면 생산공장, 생산 기계, 생산 일자를 알 수 있어 문제 해결을 위한 역추적이 가능하다.

주민등록번호는 사람에게 부여된 시리얼 넘버다. 실제로 새터민에게 주어진 주민등록번호의 지역 번호가 새터민 모두에게 같게 부여됨으로 인해 번호만 보면 새터민임 금방 알 수 있어 중국 비자가 거부되거나 국내 정착에 불이익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2020년 10월에 주민등록번호체계가 바뀌어 지역 번호가 폐지되었지만, 사람에게 번호를 부여하면 이런 문제가 생긴다.

개인 정보가 모두 들어 있고 무엇을 하던 꼭 필요한 주민등록번호. 언젠가 대형 시중은행에서 주민등록번호가 유출, 큰 문제가 되어 지금은 일부를 제외한 본인 확인에는 생년월일만 사용하도록 바뀌었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에는 주민등록번호가 그 기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지난해 봄의 마스크 대란 시에는 주민등록번호로 정해진 요일에만 주 1회 구매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중복 구매를 막을 수 있었다. 혼란을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좋으나 그만큼 모든 부분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나라는 주민등록번호 하나에 자신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편리성이 있는 반면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될 경우나, 악의로 사용되었을 경우 그 위험성이 항상 내재되어 있어 양날의 칼과 같다.

일본에서는 2016년부터 `마이넘버(my number)`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 로봇처럼 번호를 붙인다며 엄청난 반대 속에 겨우 시작되었는데,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작년 7월 기준, 마이넘버 카드 보급률은 17.5%로 아주 저조한 실적이다. 이러다 보니 코로나의 대응이 엉망이다. 마이넘버가 있으면 1인당 10만 엔(우리 돈 약 105만 원)의 소비장려금을 온라인으로 신청할 수 있지만, 마이넘버가 없으면 우편으로 각 가정에 서류를 보내고 회수를 한 후 현금을 지급해야 하므로 6개월이나 걸렸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 행정을 하는 것이다. 우리라면 며칠 안에 끝낼 일인데, 이것 역시 번호가 가진 명암이다.

지금 세상은 숫자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하지만 사람에게 그냥 숫자를 붙이는 것이 아닌 인간미가 가미된 숫자와 함께하고 싶다.

나는 `279번 고객님`이 아닌 `279번째 고객님`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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